제 5일 성요한 교회 , 이사베이 자미, 제6일 아르테미스 신전 터
잠자는 7인의 동굴을 찾았다. 로마의 박해는 피해 7명의 기독교인들이 숨었던 동굴로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 때 7명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피온 산 북동쪽의 동굴로 피신했는데 황제가 입구를 봉해버렸고 그들은 잠이 들었다. 지진으로 입구가 뚫려 밖으로 나와보니 200년이 흐른 뒤였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그들은 기도하는 삶을 살다가 죽어 동굴에 묻혔고 후에 교회가 조성되었고 비잔틴 시대에는 공동묘지로 활용되었다고 하는데 안을 전혀 볼 수 없게 담장을 쳐 놓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할 수 어뵤이 레스토랑의 벽에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며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우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대규모로 증축한 성 요한 교회다.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성 요한을 기리기 위한 교회(에페스교회)다.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제자인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셀축에 와서 살았다.
성자가 살았던 터라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성지 순례의 필수 코스였다고 한다. 유네스코 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10년 전에 비해 선인장도 훌쩍 자라 있다.
박해의 문 앞에서 기념샷. 그런데 박해의 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문의 장식 조각 때문이라고 한다. 장식 조각에는 여장을 하고 숨어 있는 아킬레우스를 찾기 위해 스키로스 섬의 궁전에 온 오디세우스와 그의 일행이 무장을 한 채 여인들 사이에 서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리스도교의 박해 장면으로 잘못 해석한 사람들이 이 문을 ‘박해의 문’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한다. 즉 이 문은 기독교 박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이며 장식의 내용은 호메로스의 저서 일리아드의 줄거리 내용이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요한은 이 언덕의 꼭대기에 움막을 짓고 은둔하면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하며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죽으면 이 언덕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는데 이런 까닭으로 일찍부터 이 언덕은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곳이 되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첫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후 이 교회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지은 바실리카 형식의 거대한 규모의 교회로 새롭게 대체되었다. 이 교회는 전형적인 그리스 정교회의 십자가 모양의 건물로, 길이 130m에 여섯 개의 돔을 가진 웅장한 건물로써 소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폐허는 바로 이 두 번째 교회의 잔해다..
사도요한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St. Sophia) 교회 다음으로 비잔틴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고, 본당 제단에는 특별히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네개의 기둥과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현재 교회안에는 사도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세례소 등이 있다.
사도요한 교회는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로써 3.5km 떨어진 에페수스(Ephesus) 유적지와 근처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12 사도중 한사람인 사도 요한을 기리기 위해 서기 548년부터 565년까지 17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동로마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확장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의해 건축되었고 에페수스의 주교 히파티우스가 공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사도요한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사도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를 본 따 십자형으로 건설되었으며 한동안 이 교회는 에페스의 대성당으로 번영했는데 비잔틴 제국 시절에는 사도요한을 경배하기 위해 제국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대지진으로 건물이 거의 다 무너졌고 얼마되지 않아 튀르크족이 이 지역을 점령해 버리는 바람에 교회는 정상적으로 복원되지 못했다.
교회는 4세기경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웠는데, 6세기에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했다고 한다. 가로 110m, 세로 140m에 6개의 돔으로 이루어졌으며 당대의 건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요한의 무덤이, 뒤편에는 교회의 모형이 있었다. 사도요한 무덤은 교회 동쪽 끝에 있으며 네개의 기둥이 세워진 그의 무덤앞 표지석에는 튀르키예어로 "St.Jean'ın mezarı" 로 되어 있고 영어로 요한이 존(John)이기 때문에 "The Tomb of St. John"이라고 씌여 있다. 교회의 첫번째 발굴은 고고학자 소티리우에 의하여 1921~1922년에 이루어졌고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에 맡겨졌고 1976년 이후부터는 에페스박물관에서 발굴과 복원작업을 계속 하였다.
5세기 경에 만들어진 침례소이다.
10년전에 왔을 때는 성채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갈 수 없어 아쉬웠다.
교회 아래에 있는 이사베이 자미로 가 본다. 대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사도요한 교회의 잔해 중 일부는 사도요한 교회 바로 밑에 세워진 이사베이 모스크(İsabey camii)를 건설하는 데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사베이 모스크는 1304년 셀축을 점령했던 아이든 올루라르 부족장의 아들인 '이사베이'의 지시에 의해 1375년 건축되었는데 다마스쿠스 출신의 건축가 드므쉬클오루 알리(Şamlı Dımışklıoğlu Ali)가 시리아 풍으로 설계한 것으로 셀주크 왕조에서 오스만 왕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중앙정원에는 잔디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에페소스 유적에서 가져온 기둥들이 서 있다.
내부 장식도 비교적 담백 산순하다. 중앙 미흐랍의 모습이다.
내부 천장 돔의 모습이다.
설교단의 모습이다.
아르테미스 신전터에 가보려 했으나 문을 닫아 다음날 아침 방문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진 아르테미스를 섬기던 신전으로 여신 숭배 사상이 강한 에페스 지역에 기원전 천년 경 그리스인들이 이주하면서 아르테미스 여신을 주신으로 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전은 기원전 550년 처음 지어졌고 총 공사 기간은 120년에 달했다고 한다. 길이 120미터, 폭 60미터에, 높이 18미터의 원형 기둥 127개를 사용한 엄청난 크기였다. 파르테논 신전의 2배 규모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곳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필적할 건축물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전은 기원전 356년 헤로투스라투스라는 사람의 방화로 무너지고 말았는데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는 이루어진 셈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신전 재건축 비용을 모두 낼테니 자신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방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던 에페스인들은 "대왕은 이미 신이신데 어찌 다른 신의 건물을 짓겠느냐"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163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약탈 당했고 로마시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버려지고 말아 이렇게 한 개의 기둥만 덩그라니 놓여진 형태가 되어 버렸다. 기둥 위에는 해오라기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