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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로 이동 후 탐방(사라예보 시청사, 바슈카르지아 거리,세빌리샘,오래된 정교회, Gazi Khusrev-beg 박물관 및 도서관, madrasah,가지-후스레브 베이 모스크, 클럭 타워, 라틴다리와 박물관, 예..

boriburuuu 2023. 6. 25. 16:06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로 가는 길은 정말 풍광이 뛰어났다.  운전수 쪽 자리에 앉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유리를 통창으로 해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진 차량이어서 전면과 좌우로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높은 산세와 푸른 물이 어우러져 많은 화가들이 작품의 영감을 받았음직한 풍경이다.  

사람이 몇 안되어 보이는 시골 마을인데 묘지를 보니 내전 희생자가 주민 수보다 많아 보일 정도였다. 전쟁의 피해가 정말 느껴진다. 

사라예보 터미널에 도착 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역시 전화로 통화를 하면서 가는데 내려보니 정말 모르겠다. 달라는대로 유로로 요금을 지불하니  운전수는 주인에게 우리의 도착을 알렸고  여주인과 그녀의 아들이 한 건물에서 내려와 같이 짐을 나르고 무사히 체크인을 했다. 알고보니 이 건물은 중세시대의 건축물이었다. 3층인데 4층은 되어 보일만큼 층고가 높았다. 꼬마 신사는 통역의 역할을 했는데 교육 잘 받은 엄친아였다. 시내를 돌아보려 나가니 바로 앞에 시청 건물이 있다. 1896년 지어진 이 건물은 외관도 내부도 참 아름답다.2차 대전후에는 국립도서관, 대학 도서관이 되었는데 1992년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세르비아군에 의해 소장품의 90% 이상이 불탔다고 한다. 1996년에 재건축되었다고...지금은 시청사로 알려져 있다.

 

우리 숙소는 바슈카르지아 거리로 바로 연결되었다. 사라예보 구시가지의 메인 광장으로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묘하게 섞여 있다. 오스만지배 시절 많은 터키인들이 모여 살았고 19세기에는 두배의 규모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비둘기 광장이다. 광장의  중앙에 세빌리샘의 모습인데 여기서 나오는 물을 먹으면 사라예보로 다시 돌아올수 있다는데 글쎄... 

오래된 정교회(Church of the Holy Archangels Michael and Gabriel in Sarajevo)라는 이름의 성당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보았다. 성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정교회는 구 정교회로도 알려져 있으며 사라예보 구시가 바로 북쪽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다. 교회는 6세기부터 이 위치에 있었지만 현재의 구조는 18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건물은 주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다각형 석조로 지어졌다. 내부는 정통 교회의 전형적인 그리스 십자가 레이아웃을 가지고 있다. 앞쪽에 기둥이 있는 아이콘노스타시스(iconostasis)가 전면에 있어 네이브를 위한 경계를 거의 형성하는 정사각형을 형성한다. 특이하게 본당 벽을 중심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

내부의 모습이다. 고풍스러운 모습이다. 

 

이 앞쪽은 박물관인것 같았다. 

우리가 나오자마자 문을 닫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티켓을 파는 곳이었는데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직원이 없었나보다. 얼떨결에 들어가서 보게 되었네. 

Gazi Khusrev-beg 박물관 및 도서관이다. 사라예보 사람들은 16세기 통치자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여긴다. 당시 그는 도서관의 기초를 놓았다. 거의 5세기 동안 여러 언어로 된 10만 개 이상의 저장 항목을 축적했다. 새로운 도서관 건물은 카타르의 자금으로 지어졌다. 이제 도서관뿐 아니라 보스니아 문화의 물질적 대상을 보관하는 박물관도 있다. 

목욕탕 유적이자 박물관이다. 둥근 지붕들은 일반적인데 높은 굴뚝이 독특하다. 

이 madrasah는 일종의 이슬람 학교로 작고 우아하고 12 개의 방을 갖춘 교육 시설입이다. 아랍 서예와 종유석 작업이 가능한 아름다운 포털이 있다. 중앙 안마당은 또한 매력적인 석조 기둥과 햇빛이 가득한 매력적이다. 전 교실은 도시에서 가장 큰 후원자 및 부스터 중 한 명이 생활하면서 겸손하지만 유익한 전시물을 포함한다. 때때로 건조한 편이지만 작은 박물관에서는 잘 어울리고 전문적이다.

가지-후스레브 베이 모스크에 왔다. 1531년 건축되었고 보스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건축이란다. 

오스만 시절 이 지역을 통치한 사람의 이름을 따 이름지어졌다. 모스크 정원(안뜰)에 있는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는 대리석 분수 '파우라바'다. 이 분수는 Gazi Husrev Bey Mosque에 있으며 숭배자들이 의식 재계를 받고 여행자와 행인을 위한 식수로 사용된다. 분수는 컵 모양의 형태이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분수의 중앙에는 아래의 더 큰 대야로 흐르는 물이 돋아나는 조각상과 같은 항아리가 있다. 전체 구조는 오스만 스타일의 목재 캐노피로 덮여 있다.

내부의 모습은 간결하고 깔끔하다. 

무슬림은 하루 5번 기도를 하는데 이 때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스크에서 바라보니 높이 솟은 시계탑이 보였다. 이 시계탑은 오스만 시대에 이 지역의 오스만 총독인 Gazi Husrev - Beg가 건설을 명령한 17세기부터 주변에 있었다. 30m 높이로 보스니아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이기도 하다. 시계는 또한 음력 시간을 유지하는 유일한 시계라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무슬림 기도 시간을 맞추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랍비들의 무덤이다.  이곳에 가지-후스레브 베이의 무덤도 있다고 한다. 

올드 사라예보 클럭 타워에 가 보았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아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그 유명한 라틴다리에 도착 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장소다. 밀야츠카강 위에 1798년 세워진 다리로 1908년 보스니아를 강제 합병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군대 사열식을 마치고 오픈카를타고 이 다리를 건너다가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에,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이 세르비아 편으로 나서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1918년까지 천만명 이상이 죽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등 대규모 지각 변동이 이루어졌다.  

비가 많이 와서 황톳물이 유유히 흐를 뿐이다. 

강 양쪽으로는 유서 깊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사라예보 박물관이다. 황태자를저격한 기브릴로는 다리 앞의 모리츠 실러 카페에 숨어 있다가 뛰어 나왔고 현재 카페는 당시의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 되었다.  

이 도시도 어딜 파나 유적이  발견되는 곳인 것 같다. 

유적지의 일부를 지하 상가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수 성심 대성당을 찾았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 지역을 지배하면서 급격히 늘어난 카톨릭 신자들을 위해 선축된 성당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네오 고딕 양식이 결합된 외관인데 사라예보에서 가장 큰 카톨릭 성당이다. 

성당 잎에 있는 사라예보의 장미다. 내전 때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인해 사라에보 곳곳에 포탄을 맞은 콘크리트 바닥을 붉은 수지로 메운 모양이 장미를 닮았다 해서 '사라예보의 장미'라 불리고 있다. 아직도 전쟁의 아픔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 기념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다. 동상은 실물 조각보다 크고 스테인리스 스틸로 조각되었다. 망토를 두툼하게 두른 채 십자가 조각상이 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고인이 된 교황의 말년을 묘사하고 있다. 교황은 마치 도을 요청하는 것처럼 지팡이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갤러리(Galerija 11/07/95)다. 스레브레니차에 관한 박물관이다. 내전 때 희생 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세르비아계에 의해 잠시가 아니라 3년이 넘게 포위되고 고립되어 있었으니 그 때의 고통이 어떠할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성당의 뒷모습인데 더 에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