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미술관/러시아 미술관

5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1

boriburuuu 2019. 8. 18. 15:20

이 건물은 원래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생 미하일로프를 위해 지어진 궁전이었으나 니꼴라이 2세 때 러시아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10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40만점 이상의 러시아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곳은 러시아 화가들의 명화와 러시아 이콘, 민예품 등을 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부르벨의 작품들도 보였다. 이번 러시아 여행에서 가장 주목해서 보았던 화가다.

<로미오와 줄리엣, 1896, 부르벨>이다.

 

<날아가는 악마, 1899. 부르벨>이다. 악마 시리즈 연작 작품 중 하나인데 미완의 작품이다. 그 이유는 눈을 그려 넣으려고 그렸다 지웠다를 거듭하고 다시 그려 넣으려고 하는 순간 친지들이 와서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 시켰기 때문이다.

<악마의 얼굴, 1904, 부르벨>이다.  이처럼 예상을 빗나가는 아름답고 슬픈 악마의 얼굴이라니. 짜르(황제)라고하는 절대자를 신과 동일시하고 악마를 혁명가와 동일시 했다니 조금 이해가 간다. 시대의 아픔이 느껴진다.

<사드코, 1900, 부르벨>이다.

<보가튀르, 1898, 부르벨>이다.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프, 1904, 부르벨>이다.  이슬람과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아즈라엘은 죽음의 천사다. '부활의 날'에 나팔을 분다고 한다. 부루벨의 아즈라엘은 뱀이 감긴 오른손으로 단검을 들었고 왼손으로 향로를 들었다. 검은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도구이고 향로는 장례 때 사용하는 장례용품이다. 매우 신비롭고 강렬한 그림이다.

 

 

 

 

간음한 여인과 예수다. 플레노프는 이 작품에서 예수가 어떻게 약자를 사랑했는지 보여주고자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유대인의 길거리가 잘 묘사되어 있는데 대각선 구도 오른쪽에 성난 군중과 왼쪽 그늘에 차분한 제자들이 있지만 두사람의 눈빛이 마주치고 있다. 여인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고 예수의 눈빛은 연민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예수를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간음한 여인과 예수, 1888, 플레노프>

일리아 레핀의 <5월 국무회의의 의식회의 >이다. 1901년.

 

폼페이 최후의 날이다. 표트르 대제의 명으로 니키틴이 황실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바로크 미술이 도입되었고 그 후 100년이 지나 유럽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작품이 탄생했는데 그린 브률로프의 이 작품이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팔로 폼페이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순간을 브률로프는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등장 인물들은 상상력을 발휘해 재난 앞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군중으로 배치했다. 아래 밝은 공간은 그림의 결론인데 숨진 어머니는 지난 시대를, 살아남은 아기는 미래를 상징하고 좌측의 횃불을 들고 십자가를 건 노인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1834년 파리 살롱전에서 1등을 하게 되어 화가의 명성이 높아졌다.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고전시대의 영웅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며 18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이후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지성인들의 생각을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일리야 레핀의 <짜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이다.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다. 이바노프는 상트 미술 아카데미 졸업 후 이태리로 유학을 갔는데 이 그림을 그린다고 알려져 니콜라이 1세의 노여움을 산다. 황제는 새로운 지도자의 탄생을 염원하는 것으로 생각해 작업을 중단시켰고 응하지 않자 이바노프의 아버지를 대학 교수직에서 해임시키고 그의 장학금을 끊어버린다. 이 그림은 20년에 걸친 대작으로 가로 7미터, 세로 5미터의 크기이다. 습작만해도 300점에 이르며 개별 인물의 다양한 표정과 자세 등을 세밀히 연구하여 독립된 작품으로 남겨 모스크바의 트레치아코프 미술관등에도 전시되어 있었다.

예수를 의심하는 로마 병사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오른쪽에, 요단강이 흐르는 왼쪽에는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이 경이에 찬 눈으로 예수를 바라본다. 그림 중앙에서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세례 요한이 저 멀리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외친다."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29절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요르단 강변에 모여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바리새인들, 로마 병사, 죄인들, 젊은이, 늙은이 등등.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믿는 자는 왼쪽에, 믿지 않는 자는 오른쪽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 현세는 구세주의 등장이 필연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계층별로 다르다.

그림 속에 절친 고골(오른쪽 옥색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듯한 남자)을 그려 놓기도 했는데 젊은 시절 기득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글을 썼으나 말년에 정교에 광신적으로 매달리는 자세를 보여 비판을 받은 그를 비판하는 오른쪽 무리 속에 그려 넣었다.

니콜라이 1세의 사망 후 1858년 이 그림을 갖고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집권층 뿐 아니라 민중으로부터도 외면 받아 절망했다. 귀국 후 두달만에 사망한다. 그러나 이후 다시 주목 받고 쉬스킨, 레핀, 바스네초프 등 민중에 대한 관심을 미술 운동으로 확산시킨 이동파를 탄생하게한 원동력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그림인 것 같았다.

필립 말랴빈의 <농민 여성>이다. 1905년.

 

 

 

 

 

 

 

 

 

 

<빨간 소, 1945, 알렉산더 시트니코브>다.

<최후의 만찬, 1984, 미하일로브>이다.  최후의 만찬을 이렇게 표현했다니 참 독특하다.

 

 

 

 

 

 

 

미하일 네스테로프의 <홀리 러스>다. 1905년. 

미하일 네스테로프의 <베일의 위대한 대화>다. 1898년.

 

 

 

 

발렌틴 세로프의 <지나이다 유수포바 공주의 초상>이다. 19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