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미술관/레오폴드 미술관

3일 레오폴드 미술관의 에곤 실레

boriburuuu 2019. 8. 18. 21:49

에곤 쉴레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다. 1912년.  현재 에곤 쉴레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예술적 기량이 절정에 달한 예술가를 보여준다. 우연한 일이 없는 균형 잡힌 구성으로, 각 선은 그 연속 또는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발견했다. 머리카락과 몸은 이미지의 수평 가장자리에서 서로 트림을 하고 밝은 붉은 색의 등불 열매로 균형을 이룬다. 균형을 더 드러내자 실레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향하고, 관찰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이미지의 구성은 특히 날카로운 선과 색의 거장 응용으로 정의된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는 자신을 연약함과 자신감을 동시에 발휘한다. 이 작품은 동시에 만들어진 월리 누질 초상화의 상대물로 구상되었는데, 이는 독특하게 비대칭적인 구성을 설명한다.

에곤 쉴레의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다. 1912년. 그의 파트너인 발리 노이질의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로 에곤 실레는 이것을 위의 자기 초상과의 상대물로 그렸다. 이 조화롭게 구성된 유사성은 약간 낮은 머리, 적갈색 머리, 그리고 지나치게 크고 밝은 푸른 눈으로 시청자를 직접 바라보는 월리 누질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쉴레의 기하학적 모양 사용과 색상의 조화다 : 주황색과 파란색, 흰색과 검은색, 빨간색과 녹색. 초상화는 친밀함과 부드러움을 발산하여 연인들의 친밀감을 드러낸다.

에곤 실레의 <늦가을의 작은 나무>다. 1911년.  나무는 그의 내면을 대변하는 듯 너무도 앙상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고작 3년간 그림을 그렸다는데 많은 그림들이 있었다.

에곤 쉴레의 <은둔자>다. 1912년.  이 그림에서 거의 실물 크기의 두 인물인 "은둔자"는 그들의 예복의 어두운 색칠에 의해 하나의 이중 인물로 합쳐져 있다.왼쪽의 인물은 에곤 쉴레 자신이며, 식별할 수 있는 반면, 두 번째 인물은 그의 친구이자 멘토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보여준다. 비록 다른 해석에 따르면, 아시시의 프란시스나 예술가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에곤 실레는 수집가이자 후원자인 칼 라이닝하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 수치들과 함께, 전 세계는 모든 존재들의 '비하'를 대표해야 한다; 한 마리의 시든 장미는 하얀 순진함을 내뿜고, 양 머리에 화환꽃과는 반대한다." 쉴레는 "그 수치들이 어떻게 불확정하게 남아 있는지, 그들은 생명에 지쳤고, 자살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몸 아래를 굽어보려고 의도되었다.,– 두 인물을 축적하고 싶어하고 힘 부족으로 붕괴해야 하는 지구와 비슷한 먼지 구름이라고 생각해 보라." 

 

에곤 쉴레의 <에곤 실레, 앉아 있는 남성 누드(자화상)>이다.  1910년.  에곤 실레는 자신이 상상하는 급진적이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그대로 무대에 올렸고, 표정과 몸짓을 통해 해부학적으로 가능한 것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것의 초기 하이라이트는 1910년 그림인 "Seated Male Nude"(자기-초상)이다. 20세의 이 예술가는 거의 고통스러운 신체적인 자세로 벌거벗은 채로 자신을 보여주었다. 피부, 그리고 그것으로 신체의 관능적인 표면은 모든 힘줄, 근육, 뼈가 강조되어 나타나서 신체가 거의 피부가 벗겨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는 이 조각난 몸을 뚜렷한 서술적 맥락 없이 캔버스에 투사했다. 노란 녹색 살, 신호 적색 눈, 유두, 배꼽 및 성기는 자연주의적인 색 구성표와는 거리가 멀다.

에곤 쉴레의 <공중부양, 눈먼사람2>이다. 1915년.

에곤 쉴레의 <바람속의 가을 나무>다. 1912년.  늦가을의 앙상한 나무에서 생명의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에곤 쉴레의 <죽은 도시, 또는 푸른 강이 있는 도시>다. 1911년.  외할머니의 집인 체스키 크루물로브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단다.

에곤 쉴레의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자화상>이다. 1910년.   감수성이 강하면서도 반항적인 느낌이 드는 미소년의 모습이다. 실레의 잘생긴 외모도 한몫을 단단히 하는 것 같다.

에곤 쉴레의 <어깨를 드러낸 자화상>이다.  1912년.

 

에곤 쉴레의 <시인>이다. 1911년.

에곤 쉴레의 <머리 숙인 자화상>이다. 1912년.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에곤 쉴레는 완전히 새롭고 급진적으로 표현적인 표현 스타일로 틀림없는 "오스트리아인" 형태의 표현주의를 공식화했는데, 이 표현 스타일로 클림트의 강한 영향력과 분리를 포기했다. 이 기괴하고 섬뜩한 자화상은 대형 그림인 "The Hermits"와 관련하여 나타났다. 이 작품에서 쉴레는 머리와 어깨의 자세와 비슷한 손가락을 채택했다. 위로 뒤틀린 예술가의 눈이 고개를 숙일 때 눈에 띄게 전면으로 온다.창백한 배경에서 볼이 움푹 들어간 그의 어두운 얼굴이 뿜어져 나온다. 1912년의 표현 자화상 시리즈는 쉴레가 안톤 요제프 트르카에 의해 직접 사진을 찍었던 1914년에 계속되었다. 각각의 개별 사진은 표현적인 몸짓과 얼굴 표정으로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에곤 쉴레의 <어머니와 두 아이들>이다. 1915년.

에곤 쉴레의 <어머니와 아이>다. 1914년.

에곤 쉴레의 <눈먼 어머니, 혹은 어머니>이다. 1913년.

에곤 쉴레의 <엄마와 아이>다. 1912년. 아이의 깜짝 놀란듯한 동그란 눈이 강렬하다.

에곤 쉴레의 <어머니의 죽음>이다.  1910년.

 

 

에곤 쉴레의 <골고다 언덕>이다. 1912년.

에곤 실레의 <>이다. 1911년.

에곤 실레의 <레버레이션>이다. 1911년.

에곤 쉴레의 <추기경과수녀>이다. 1912년.  추기경과 수녀의 추잡한 포옹에서 사무적인 도덕규범을 위반하는 것과 같은 도발적인 그림 콘텐츠는 에곤 쉴레가 예술의 공식적인 문제를 넘어 전통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충동적인 갱신 충동을 증명한다. 이 커플의 관계는, 그것의 엄격한 형태 구조에 의해 시행되어, 쉴레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명한 그림인 "키스"를 패러프레이징하고 있다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수녀의 얼굴에 나타난 충격적인 표정은 1912년의 레이즈드 베어 숄더와 실레의 자기 초상과 현저하게 닮았다. 반면에 추기경의 벌거벗은 다리는 쉴레의 동료인 월리 누질이 맨다리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이전의 수채화에서 직접 인용한 것 같다. 따라서 실레는 비록  역할이기는 하지만 추기경과 수녀에게 자신과 월리의 신분을 적용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구도 등이 스승인 클림트의 '키스'를 닮았다.

에곤 쉴레의 <전도사. 블루-그린 셔츠를 입은 자화상>이다. 1913년.

에곤 쉴레의 <누워 있는 여자>다. 1917년.

에곤 쉴레의 <쪼그리고 앉아 있는 두 명의 여인들>이다. 1918년.

 

에곤 실레의 < 러브메이킹>이다. 1915년.

 

 

에곤 쉴레의 <국화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 해바라기인줄 알았는데 말이다.

 

에곤 쉴레의 <<트리스테 항구>다.

 

 

에곤 쉴레의 <지는 해>이다.  1913년.  가로층과 선으로 구성되어 건조한 가지가 있는 나무와 교차하는 풍경은 시원한 빨간색과 파란색 톤의 색 조화가 지배한다. 석양의 모티브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세계와 전반적인 삶에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그림의 우울하고 거의 어두운 표현을 강조한다. 에곤 실레는 1913년 수집가 프란츠 하우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주로 산, 물, 나무, 꽃의 물리적 움직임을 관찰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몸 안에서 비슷한 움직임, 식물에서의 쾌락과 고통의 비슷한 동요를 연상시킨다. 나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색을 사용하여 자질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여름에 가을 나무를 보면, 그것은 마음과 존재를 포함하는 강렬한 경험이다. 그리고 나는 그 우울함을 그려야 한다. " 

 에곤 쉴레의 <지붕널 지붕이 있는 집>이다. 1915년.  크루마우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개인적으로 이 풍경화들이 마음에 들었다.

에곤 쉴레의 <바닷가의 집들, 늘어선 집들>이다. 1914년. 

에곤 쉴레의 <강변의 잡 담벼락>이다. 1915년.

에곤 쉴레의 < 집들로 된 만곡, 또는 고립된 도시)>이다. 1915년.  오늘날의 에스크 크럼로프인 크루마우의 성 언덕에서 볼 수 있는 이 곡선의 집들은 정확하게 식별될 수 있다. 이들이 눈에 띄게 하기 위해 화가는 성 요도쿠스 교회와 함께 배경과 다리, 반대 둑에 있는 집들을 생략했다. 그의 관심사는 지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입체파적인 터치로, 섬과 같은 반도에 구성 중심이 위치한 각선의 미로 같은 네트워크를 그리는 것이었다. 외관, 지붕 및 굴뚝의 다른 구성 요소로 건물은 단단한 기하학의 외관을 가지고 있다. 녹색과 라일락 밴드는 푸가의 목소리처럼 자신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집의 외관을 따라간다. 이 초승달의 움직임 감각은 가을 나무의 줄에 의해 향상된다. 육지와 암흑수 사이의 직선 경계처럼, 모든 나무와 땅의 구조물은 활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어 건물 블록의 공간적인 예인력을 더한다. 

 

에곤 쉴레의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 또는 소도시 4>이다. 1914년.

 

 

 

에곤 쉴레의 <폴디 로드진스키의 초상>이다. 1910년. 초기작이라 그런지 색상도 밝고 눈과 손, 특히 손가락이 많이 강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