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술관/시안 비림박물관

비림박물관 1-7전시실

boriburuuu 2019. 11. 7. 21:14




  섬서성박물관은 본래 공자의 문묘였던 곳인데 이곳에 당 송이래 전해 내려오는 석비나 법첩 등을 모아놓으면서 박물관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다. 송나라의 여대충이 당의 개성석경이 유실되는 것을 염려하여 문묘의 뒤에 옮겨놓고, 당 현종이 어주한 효경비와 안진경 구양순 저수량 같은 역대의 저명한 서예가들이 쓴 석비를 주위로 모아 비의 숲을 이루게 한 것이 그 효시였다. 그래서 이름을 비림이라고 했다. 명 성화년간(1465~1487)과 청 강희년간(1662~1722), 건융년간(1736~1795)에 더 보충하였다현재는 500여 점을 수장하고 있어 중국 서예사 연구의 보고 구실을 하고 있다비림의 현판은 미완성인데 현판을 쓰던 임칙서가 아편전쟁에서 진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면서 돌아와 완성하겠다고 했는데 귀양 중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출정 중 사망해 미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전시관 입구에는 당 현종이 주석을 단 효경비가 서 있는데, 이것은 크기가 대형일 뿐만 아니라 비개석이나 비좌의 조각미도 일품이어서 비림 가운데 가장 귀중하게 취급되고 있다.








1실에는 당나라 때 석각한 개성석경(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양전 효경 논어 이아 등 12)를 진열하였다. 도합 114개의 비석 양면에 228면 65만자를 새긴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서적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청나라 강희 3년(1664년)에 <맹자>기 추가로 새겨져 드디어 13점이 되었단다.  <개성석경은 중국 고대의 7차례에 걸쳐 새긴 유가 경전의 각석들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고 오래된 경전으로 북송 원우 2년(1087년)에 처음으로 비림에 옮겨져 이 박물관의 초석이 되었다. 당나라 때 새긴 석경들은 주로 학자들에게 제공되어 경전의 모범이 되었고 다른 곳이도 전해져 표준이 되었다. 13경은 중국 봉건시대 지식인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얻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 되었고 중화문화의 민족정신의 원천이 되었다.  아마도 활자가 없던 시절에 활자이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지금도 열심히 탁본을 뜨는걸 보면. 하긴 그것도 중국이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명한 나라였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으리라.  보존을 위해 유리장안에 넣어두어 빛반사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2실에는 서성으로 칭송 받는 왕희지,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범으로 삼는 구양순 구양통 저수량 당대 해서의 모범이 된 안진경 유공권, 우리나라 서예에 큰 영향을 끼친 조맹부 등 당나라 서예 대가들의 걸작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고대 기독교 종파 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비석이다.   비석 상부의 구름에 둘러싸인 십자가가 보이고 하부는 거북이 문양이어 불교와 기독교가 조화된 모습이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당 겅중 2년(781)>



<대지선사비, 당 개명24년(736) 사유칙 서>

<다보탑 감응비, 당 천보 11년(752)  안진경 서>

<안씨 가묘비, 당 건중 원년(780), 안진경 서>

     3실에는 역대의 서체를 대표하는 작품들, 예를 들면 예서의 한 조전비, 해서의 당 곽가비, 전서의 송 전서목록편방자원, 행서의 당 혜견선사비, 초서의 당 회소의 초서천자문 등을 전시하였다.

<전서 천자문 서비, 북송 건덕 5년(967), 황보영 서> 자세히 보면 아래와 같다. 빛반사가 너무 심해 사진이 별 의미가 없었다.

4실에는 송, 명 시기의 명필들의 흔적이 각석되어 있는 것 외에 송에서 청에 이르기까지의 석각도화가 있다. 송의 <장안성잔도>, <당흥경궁도>, 청의 <태화산전도>, <관중 팔경>, 등은 고대 건축과 명산 승적을 연구함에 있어 중요 참고 가치가 있다. 송의 <왕유화죽>, 청의 <공자상>, <달마상>, <송학도>, <관제시죽>등도 아주 높은 예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1716년 청나라 화가가 그린 관제시죽은 곧은 대나무와 꺾어진 대나무를 조각했는데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잡혔을 때의 심경을 그린 것이란다.

<태백전도, 청 강희 39년(1700)> 태백산은 섬서성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태화전도, 청 강희 39년(1700)> 시안의 화산을 태화산이라 불렀다.

<공자상, 청 옹정 12년(1734)>


<관제시죽, 청 강희 55년(1716)> 곧은 대나무와 꺾어진 대나무를 조각했는데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잡혔을 때의 심경을 그린 것이란다대나무 잎 오른쪽 끝을 자세히 보면 아니 불자가 새겨져 있다.

<괴성점두도, 청 동치연간(1862-1874)>

<


<송학도, 청 강희 19년(1680)>



<허중군자, 청 강희 38년(1699)>

<달마동도도, 청나라>

<달마며벽도, 청나라>


5싱에는 송, 원, 명, 청 시대의 비석이 진열되어 있고 청을 위주로 한다. 당시 사회와 지방 역사를 연구하는 참고 자료가 된다. 특히 청의 강희황제, 왕탁, 좌종당 등이 적은 비각은 서법 예술에 있어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서예에 별다른 조에가 없는 나는 일필휘지로 쓴듯한 큰 글자들이 좋았다. 효, 복, 수 등



<송자관음상, 청나라> 얼른 보면 성모자상 같은 포즈다.

<삼우도, 청 건륭 연간(1736-1795) 이봉춘 그림>

<문묘 제사 위치, 청 용청 13년(1735)>



탁본을 뜨고 있는 모습이다.

역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큰 글자를 좋아하나보다, 한 청년이 열심히 탁본을 뜨고 있다.


<일필 호, 청 함풍 6년(1856) 하하자목예>

<일필 수, 청 도광 24년(1844). 여도인 서예>



<일필 수, 청 동치 3년(1864), 마덕소 서예>

<일필 호, 청 동치 5년(1866), 마덕소 서예>

제6실은 대다수 청나라 사람이 쓴 운문이다.

<죽경시비, 청 용정 연간(1723-1735)>

<오악진형도, 청 강희 21년(1682)>















아마도 이 종이 종루에 걸려 있던 그 종같아 여러장 찍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