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술관/루앙미술관

루앙미술관4

boriburuuu 2020. 12. 17. 23:33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의 첫번째 그림인 <파사드와 투르 달바네. 잿빛 날씨 >다. 1894년. 루앙 대성당 시리즈는 하루 중 다른 시간에 서쪽 외관의 28개 이상의 전망을 특징으로 한다. 이 시리즈는 1892년에서 1893년 사이에 그려졌다. 그림은 성당 앞의 선물 가게에서 그린 것 중 하나다. 그러나 대기를 포화시키는 물의 입자에 의해 야기되는 안개 낀 날씨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인식의 변화만이 예술가의 관심을 실제로 사로잡았기 때문에 여기서 포착된 하루의 순간을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루앙의 날씨에 전형적인 무거운 하늘은 건물 위에 베일을 드리웠는데, 회색과 파란색의 그늘로 만들어졌다.

 

까미유 피사로의 <폰트 보이엘디외, 루앙, 선셋, 미스티 웨더 >다. 1896년. 1883년 루앙에 처음 머문 후 피사로는 1896년에 돌아와 파리의 Htel de Paris와 그 다음 세느강을 내려다보는 Htel d' Angleterre에 머물렀다. 그의 눈 문제는 그가 더 이상 야외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호텔 방은 그에게 강과 그 다리를 칠할 수 있는 큰 유리한 지점을 주었다. 화가는 2월 26일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을 묘사했다. "주제는 습한 날씨에 많은 수의 마차, 보행자, 부두, 보트, 연기, 멀리서 안개가 활기차고 활기찬 철교다." 현미경으로는 작지만 붓놀림은 여전히 상호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분단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구름 질량을 렌더링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거의 평평한 색상의이 영역은 가장자리 주변의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는 긴 스트로크에 의해서만 활기를 띠게 된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피사로는 마음속으로는 순수한 인상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포트말리 홍수 >다. 1876년. 시슬리는 1875년 봄 말리레로이에 정착하여 3년간 머물렀기 때문에 1876년의 대홍수를 목격했다. 그는 이미 루비엔느와 영국의 햄튼 코트에서 여러 차례 홍수를 그렸지만 말리에서는 그 주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고 여섯 번 그렸다. 인상주의의 걸작인 루앙 그림은 마치 거울에 비친 표면처럼 센 강물의 침수된 물에 누워 있는 와인 상인의 집인 세인트 니콜라스를 묘사하고 있다. 그 집은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마을과 연결하기 위해 갱도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건물은 물 위에 충돌하는 마지막 단단한 가장자리를 형성한다. 빛과 반사를 탐구하는 예술가에게는 매혹적인 주제다. 시슬리의 극도로 섬세한 색채 터치는 그가 즉시 매우 미묘하지만 대조로 가득 찬 장면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반면, 붓놀림의 폭은 그림의 형태에 해가 되지 않는데, 이것은 그를 모네와 근본적으로 차별화시키는 점이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아침 햇살의 모레에 있는 교회 >다. 1893년. 1889년 11월 시슬리는 모레수르로잉에 영구히 정착하여 1899년 사망할 때까지 아름다운 고딕 교회 아래에 작은 정원이 있는 작은 집에서 살았다. 1893년에서 1894년 사이에 그는 같은 각도에서 다소 떨어진 12장의 교회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일년 중 다른 시기와 다른 날씨 조건에서 본당의 서쪽 입구와 남쪽 벽을 보여주었고, 같은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루앙 성당의 외관을 포착하려는 모네의 작품을 반영했다. 모네는 모든 색진동을 탐구하기 위해 주제를 해체한 반면, 시슬리는 기념비적인 건축적 특성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세부사항 모두에서 그것을 분석하게 되었다. 그가 이끌어내는 색 변화는 그의 눈이 실제로 보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다. 그는 모네의 신기루에 대한 환영과는 거리가 먼 주제의 자연 광도를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남아 있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웨일즈 레이디스 코브 >다. 1897년.  그의 죽음 2년 전에 그려진이 작품은 시슬리의 예술적 마지막 의지와 증언으로 간주된다.  인생의 늦은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완전한 숙달을 보여 주었고, 요소가 불필요한 그림을 제작했다. 이것은 놀라운 작품이다. 그에게 새로운 장르로 그려진, 원래의 구성에서 예술가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계획은 하늘을 출발점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구성은 파도가 바위에 충돌하는 힘을 강조하면서 거품이 이는 파도의 강한 대각선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이미 중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시슬리는 그 장면을 완전히 삶에서 그리면서, 빈틈없이 일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이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일본 예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햇살 아래 언덕길>이다. 1893년. 지평선을 향해 떠오르는 길은 시슬리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지만, 선샤인의 업힐 로드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공간의 구조는 시슬리의 작품에서 항상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그는 오른쪽 언덕의 절벽과 왼쪽의 갑작스러운 경사를 아주 작은 수직선에 의지하지 않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의 기교를 보여준다. 왼쪽 산등성이의 맷돌, 계곡의 바닥을 향한 나무의 뽀뽀, 두 개의 중심 나무 등 둥근 형태만 레벨의 차이를 암시한다. 정면에서 거꾸로 보이는 평면의 차이는 일련의 그림자, 도로를 가로지르는 그늘을 드리우는 보이지 않는 나무, 멀리 떨어진 작은 인물들, 그리고 먼 지평선을 엿보는 교회 첨탑을 통해 엄격하게 표현된다. 강렬한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흩어지는 하얀 구름은 거친 오후 태양에 의해 둔탁해진 풍경의 주황색과 오크레 톤에 의해 상쇄되어, 그 장면은 시슬리의 최고의 작품의 트레이드마크인 일종의 명상적이고 조용한 품질을 제공한다.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근처의 개양귀비가 피어있는 들판>이다. 1885년. 그림에는 서명이 없으며 모네의 그림인지 때때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작가의 아들 미셸 모네의 인증을 받았는데, 그는 현재 사라진 "클로드 모네"스탬프를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날짜에 루앙 박물관에 도착하기 전에 캔버스의 왼쪽 하단에 추가했다. 보고되지 않은 "클로드 모네"비문은 캔버스 뒷면에 여전히 남아 있다. 장인 정신은 빠르고 자신감있는 움직임으로 구별되며, 작고 거의 추상적 인 붓놀림으로 완벽한 움직임의 숙달을 보여준다.

클로드 모네의 <포트빌레스의 세느강 >이다. 1894년. 포트빌레스의 세인은 클로드 모네의 작품에서 그의 기술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접근에서도 심오한 변화를 드러낸다. 세느 강둑을 뒤덮고 있는 안개와 그들이 반사의 놀이를 변형시키는 방식에 그 어느 때보다 잘 적응한 그는 성당의 알록달록한 질감을 버리고, 따라서 혼합된 붓놀림으로 특징지어지는 스타일을 채택하여 캔버스가 꿰뚫을 정도로 얇은 균일한 마무리를 만들어냈다. 예술가는 물 속에 반사된 강둑에 노란 색과 연어의 음이 있는 무지개 빛이 되는 언덕의 순수한 푸른색에서부터 오크레의 손길로 밝아진 나무의 푸른 녹색에 이르기까지 팔레트에 충실했다. 그는 우유빛 색조로 다양한 색상을 곱게 조율하여 아몬드 그린의 전반적인 톤 인상을 준다. 그 효과는 선의 용해에 의해 강화된다; 현실의 한계가 지워진 것 같다.

 

 

클로드 모네의<배퇴유의 세느강>이다. 1879년 제한된 색상 팔레트를 사용하여 칠해진 이 작품은 예술가의 숙달을 반영하며 움직임은 제작자의 생각을 완벽하게 반영한다. 그림의 초상화 형식을 사용하면 하늘과 물 속의 반사를 함께 표현할 수 있다. 하늘에서 더 둥글고 물에서 더 길고 가느다란 스트로크 만이 보는 사람의 혼란을 방지하고 풍경을 명확하게 해석 할 수있게 한다.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국화 부케>다. 1884년. 국화의 부케는 평범한 꽃병에 있는 하나의 꽃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한 르누아르의 다른 꽃꽂이와 다르다. 다른 많은 정물들과는 달리, 그것은 과일과 꽃의 조합도, 차딘에서 판틴-라투르에 이르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도자 꽃병도, 예를 들어 호화로운 직물로 장식된 복잡하거나 다층적인 배경에 대비한 꽃꽂이도 특징이 없다. 르누아르는 꽃잎 모양을 통해 꽃들이 그의 소용돌이치는 붓놀림이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방향을 지시하도록 허락했다; 그것은 그림의 심오한 단결감과 그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질이다.

아르망 길라르망의 <길라르망 부인>이다. 1888년. 길라르망은 1887 년 1 월 10 일 파리에서 마리 조셉 가르통과 결혼했으며 아이 돌보기, 바느질 등 가정 현장에서 작가의 아내를 묘사하는 많은 작품 중 하나로 부부의 친밀한 행복을 포착한다.

 

스타니스라스 레핀의 <파리의 눈 덮힌 동네>다. 레핀은 코로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예술계에서 고립된 그는 도시 그림, 특히 센느와 몽마르트르를 바라 보는 파리를 선호했다. 그러나 레핀은 풍경의 학문적 아름다움보다는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있었다. 이 풍경은 눈으로 인해 작업이 중단 된 목공 안뜰을 보여준다. 짐을 짊어진 외로운 인물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준다.

클로드 모네의 <1878년 6월 30일의 기념식인  생데니스 거리>다. 1878년.  그림의 주제는 보수파가 권력을 되찾은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패배한 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개최된 국가 축하 행사다. 축제는 1878년 유니버설 전시회를 기념했으며 몇 달 후 설립된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출현을 예고했다. 사회평론가들은 트리컬러가 파리 거리를 지배했던 6월 30일 일요일에 분명히 나타난 열정에 대해 언급했다. 곤쿠르 형제에 따르면, 고인을 묘지로 운반하는 소리조차 국기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기쁨에 찬 파리인들이 넘쳐나는 거리는 높은 곳에서 강한 관점으로 묘사된다. 군중의 어두운 삼각형은 하늘의 거꾸로 된 삼각형을 향해 뻗어 있다. 빠른 붓놀림으로 렌더링되고, 순수한 색깔의 섬광으로, 펄럭이고,  비틀리는 깃발이 공간을 지배한다. 무중력, 변화하는 분위기에서, 현수막은 'VIVE LA FRANCE'를 숨기고 깃발은 부분만 보여준다.

클로드 모네의 <로드, 눈의 효과, 일몰) 이다. 1869년. 1994년 5월 독일에서 프랑스로 반환된 28점의 작품 중 하나다.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마을>이다. 1840년.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산기슭>이다. 1840년.

 

 

 

크루베의 <폭풍우>다.

클로드 모네의 <꿩이 있는 정물>이다. 1861년경 모네가 그린 초기 작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정물화는 샤딘의 전통과 트로이온의 전통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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