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술관/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 앙리 루소

boriburuuu 2020. 10. 9. 14:21

앙리 루소의 <결혼식>이다. 1905년.  첫눈에 우리는 결혼식의 사진 초상화를 보고 있다. 정장을 입은 주인공들이 사진사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부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 신부의 베일은 할머니의 드레스 위에 있으며, 구성의 다른 수준에 캐릭터를 배치함으로써 제안된 관점과 모순된다. 어설픈 실수가 아니고 의도적인 것이고, 그것은 다시 칠해져 왔고, 따라서 예술가의 의도적인 선택이다.  흰 옷을 입은 신부는 공중에 떠 있는 유령과 같다. 여기서 다시, 루소는 현실 세계에 이상한 요소를 도입하는 역할을 한다. 전경에 있는 개는 코믹하게 크기가 크고 어색하며, 조성물에 눈을 깊이 담는 반항아 또는 장치 역할을 한다. 르두아니에르는 공간 역설의 달인으로서의 위치를 주장한다. 사람들은 너무 작고 잎이 적은 단풍을 가진 양식화된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은 강렬한 푸른색, 이타적인 것이다. 나무와 노란 황토 배경은 그룹 주위에 일종의 만돌라를 형성한다.

앙리 루소의 <4명의 낚시꾼들이 있는 풍경>이다. 1909년.  루소는 여가 시간에 평범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서, 머리 위를 비행하는 비행기는 배경의 공장 굴뚝처럼 구성에 현대적인 터치를 도입한다. 루소는 그의 작품에서 비행선과 항공기를 여러 번 묘사하여 현대성을 대표하는 선구자로 만들었다. 해변, 즉 황토색의 흙덩어리는 어부들의 공간을 집과 분리한다. 그림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정면으로 묘사된 집들이 지면의 곡선을 따라가면서 공간에 이상하게 앉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발이 잘린 어부들은 물 위에 놓여 있는 것 같거나, 오히려 땅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다. 

앙리 루소의 <폭풍우 속의 배>이다. 1899년. 이 배는 다른 모델들의 융합인 것 같다. 그것은 해양 라이너와 같은 포톨과 전함 같은 컷워터를 가지고 있다. 이 조합은 당시 장난감 보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루소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었거나 광고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다. 세 번째 고르지 않은 간격의 깔때기는 1896년에 발사된 순양함에서 그런 것이었다.
어떤 경우든 루소는 민속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소피치가 발행한 이탈리아 잡지 라 보스의 기사에서 루소는 "단순한 그림"에 대한 그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앙리 루소의 <해안의 절벽>이다. 1895년.  노르망디 해안의 절벽을 표현한 이 그림은 루소의 특이한 모티브로, 파리 교외를 거의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모네 또는 크루베 등 화가들의 그림을 재현해서 그렸을 것이다. 또는 더 무명 예술가들에 의해 노르망디의 수많은 절벽 그림들 중 하나에서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루소는 아마도 여러 출처를 결합하고, 이 풍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그의 그림을 완전히 재구성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바위의 구조와 그의 바다 표현은 매우 단순화되고 감소된다.  그는 어부와 대형 범선을 추가한다. 여기서 다시, 그 관심은 루소가 모티브를 포착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민속 이미지의 그래픽 스타일에 영감을 받았다.

앙리 루소의 <인형을 들고 있는 아이>이다. 1892년.  똑바로 쳐다보는 아이가 불안하고 최면술에 걸린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거대하고 불균형해 보인다. 다소 이상하게 풀밭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다리는 팔, 특히 인기 있는 판지 인형을 들고 있는 오른팔과 관련하여 엄청나다 ,몸은 "이집트 스타일"로 표현되며, 몸의 윗부분은 얼굴을 보고 다리는 옆에서 본다. 그것은 사실상 2차원적이며, 어린 소녀의 빨간 드레스에 있는 하얀 점들은 문자 그대로 배경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형상의 평평함을 강조한다. 풍경은 심각하게 축소된다 . 거의 균일한 푸른 하늘과 중세 태피스트리와 비슷한 꽃이 점철된 초원. 그러나 루소는 멀리 풀을 어둡게 하고 데이지의 크기를 줄임으로써 약간의 원근감을 만들어낸다. 아이의 허벅지 밑의 음영은 조명이 비치는 원고를 떠올린다. 루소는 모든 장르에서 원시주의에 매료된 시대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원시인"의 미학을 재발견했다. 그것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안드레 로테에게 이렇게 쓰게 한 그의 예술의 한 측면이었다: "중세에 그는 군중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르센 알렉산드르는 그를 "우리 세기의 파올로 우첼로"라고 부르도록 했다. 

앙리 루소의 <주니에 신부의 마차>이다. 1908년.  페레 주니어는 아침에 채소를 사오면 아내는 요리를 했는데 말을 사고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사진을 찍어 그림을 그렸지만 길에서 나무를 없에고  특히 세 마리의 개들의 크기와 위치에 놓았다. 이것들은 시각적 기능을 하는데 뚱뚱한 검은 개는 카트에 깊이를 준다. 반면에 작은 개는 수레 앞에서 걷는 것은 암말에게 기념비적인 것을 준다. 그녀는 발굽 끝에 다소 호기심을 갖고 서서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강조한다. 이 암말은 거의 정지된 것 같다. 루소는 이런 종류의 역설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것은 일부 등장인물들을 순수하게 그림 공간에 띄우게 한다. 무슈 주니어를 제외한 카트에 탄 승객들은 비잔틴 아이콘과 같은 엄격한 정면에서 보여진다. 

앙리 루소의 <알프로빌의 의자 공장>이다. 1897년.  이 작은 버전에서는 풍경, 특히 하늘이 더 두드러진다. 공장 앞의 캐릭터는 단지 토큰 수치이지만 건물은 다른 건물과 동일한 규모로 보인다. 이 버전은 1897년 살롱 드 인디펜던스에서 전시된 더 큰 버전보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보인다. 다른 그림과 달리 건물의 선은 더 정결하고 강둑과 도로의 선은 덜 양식화되어 있다. 당시의 엽서에 따르면, 굴뚝이 없는 것은 알포트빌의 풍경의 특징이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여기서 그들은 나무로 대체된다. 아마도 자연계를 그림으로 더 많이 가져오기 위해서일 것이다. 같은 장소의 두 가지 표현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루소가 그의 풍경을 어느 정도 재구성했는지 알 수 있다. 

앙리 루소의 <알트로빌의 의자 공장>이다. 1897년.  여기서 루소는 의자 공장의 풍경 초상화를 선보인다. 건물은 나머지 경관과 관련하여, 특히 수치와 관련하여 너무 크다. 이것들은 구성에서 간단한 구두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루소는 종종 그의 풍경에 이러한 규모의 왜곡을 포함한다. 루소는 중세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여 그림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을 강조한다. 이 버전의 건물에는 도로의 매우 측정된 곡선과 센 강둑의 균형을 맞추는 매우 단단한 선이 있다. 평범한 도시 풍경의 이미지는 대규모로, 루소의 파리 교외 그림 시리즈에서 매우 특이했다. 이것은 아마도 1897년 살롱 드 인디펜던스에서 에서 제시된 버전일 것이다.

앙리 루소의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1908-19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