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술관/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빈센트 반 고흐

boriburuuu 2020. 11. 30. 13:51

고흐는 해바라기 뿐 아니라 다른 꽃도 많이 그렸나보다. <장미꽃>이다. 장미는 반 고흐가 생레미의 병원에서 나오기 직전에 그려졌다. 그는 자신이 병을, 그리고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느꼈다. 이 치유 과정에서 그림은 모두 중요했다. 그는 회복 3주 동안 동생 테오를 썼으며 "격렿하게 일했다"고 말했다. 꽃다발, 보라색 홍채, 장미꽃다발..." 이것은 반 고흐가 당시에 그린 두 점의 장미 그림 중 하나이다. 그것은 그의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정물화 중 하나이며, 만개한 영광 속에 활기찬 꽃다발이 있다. 그는 때때로 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반 고흐는 장미에 대한 구체적인 연관성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꽃이 피는 모든 식물을 생과 갱신의 축하로 본 것은 분명하다. 그 감각은 배경의 신선한 봄 녹색에 의해 여기에 강조된다. 대각선 스트로크로 바른 물결 모양의 페인트 리본은 캔버스를 애니메이션화하고 꽃과 잎의 털이 있는 형태를 벗어난다. 원래 장미는 분홍색이었고, 색이 희미해졌으며 녹색과 상보적인 색상의 대조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보완의 조합은 반 고흐를 매료시켰다. 페인트는 매우 두껍다. 1890년 5월 16일 반 고흐가 생 레미를 떠날 때 두 장미 그림이 모두 남겨졌다. 그가 테오에게 설명했듯이, "이 캔버스들은 말리는데 한 달이 걸릴 것이지만, 여기 수행원은 내가 떠난 후에 그들을 보내줄 것이다.",그들은 6월 24일까지 오베르에 도착했다.

고흐의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다.  1889년.  반 고흐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머물면서 적어도 36점 중 하나인 이 자화상을 만들었다. 6주 동안 그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 이것이 그가 만든 첫 번째 캔버스였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그들은,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것을 믿는다.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지만, 자신을 그리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모델이 없어서 내 초상화를 두 장 작업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작은 그림을 그릴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일어나던 날에 시작했다. 나는 말랐고 유령처럼 창백했다. 짙은 보라색이고 머리는 노란 머리로 희끗희끗해 색 효과가 있다. 반 고흐는 일을 해야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고, 이 이미지에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화가의 옷를 입는다.그의 삶을 정의한 열정과 연약함은 그의 관통하는 눈과 흔들리는 윤곽에 못지 않게 색깔과 안절부절못하는 붓놀림의 극명한 대조로 말해진다. 

고흐의 <풍경>이다.

고흐의 < 네덜란드의 꽃밭>이다. 1883년

고흐의 <프로방스의 농장>이다. 1888년. 반 고흐는 1888년 2월 눈으로 뒤덮인 풍경인 아를에 도착했다. 하지만 프로방스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태양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씻어내고 형태를 단순화시켜 주변 세계를 일본 목판화에서 존경하는 평평한 패턴으로 축소시키는 눈부신 빛이었다. 그는 "알레스는 남부의 일본"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의 알레스에서의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생산적이었다. 약 15개월 동안, 단지 444일 만에, 그는 200점 이상의 그림과 약 100점의 그림을 제작했고 200자 이상의 편지를 썼다. 그는 밀밭에 대한 일련의 7 가지 연구를 묘사했다 : "경관, 노란 - 오래된 금 - 빠르게, 빠르게, 그리고 불타는 태양 아래서 침묵하는 수확기와 마찬가지로, 수확에만 전념하는 수확기처럼 서둘러 갔다.",그러나 그는 또한 이 "빨리 캔버스의 연속이 빨리 실행되었지만 오래 전에 계산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성급하게 비판되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고희의 <룰랭의 아기>다. 1888년. 테오에게 편지를 많이 쓰다보니 우편배달부인 조셉 룰랭과 친한 사이가 되었다.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던 고흐는 그의 가족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 중 하나다.

고흐의 <올리브 농장>이다.  1889년.

고흐의 <푸른색 장갑이 있는 오렌지와 레몬의 정물화 >이다. 1889년.  빈센트 반 고흐는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 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곳에서 폴 고갱이 아를레스에서 함께 지내던 참담한 마지막 날로부터 회복되고 있었다. 1889년 1월 23일 그의 형제 테오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 그는 그림 판매를 통해 돈을 벌 필요가 있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다른 문제와 함께이 그림을 만드는 것을 언급한다. 그는 이 정물화를 파는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화가는 고리버들 바구니에 배열된 감귤류의 모양과 색조,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궤도 모양이 말린 막대기의 짜임새에 대항하는 방식, 사이프러스 가지의 따끔따끔한 바늘에 의해 온몸이 꺼지는 방식에 분명히 끌렸다. 반 고흐는 이 사진에서 "시크한 분위기"에 대한 편지를 언급하는데, 아마도 푸른 정원 장갑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이 그림은 다양한 과일의 표면을 환기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화가의 매우 독창적인 색채감과 풍부한 표현력의 페인트 응용을 보여준다. 

고흐의 <오베르의 푸른 들판>이다.  1890년.

고흐의 <흰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다. 1890년. 1890년 5월 21일 반 고흐는 파리 외곽의 작은 마을인 오베르에 도착했다. 그의 동생 테오는 그의 건강에 대해 걱정하면서 동종 요법 의사이자 열렬한 예술 후원자인 폴 가셰의 보살핌을 받으라고 제안했다. 반 고흐는 오베르에 도착한 후 7월 29일 사망할 때까지 하루에 1점 이상인 70여 점의 그림과 많은 그림을 그렸다. 6월 중순에 그는 고갱에게 썼다. "나는 밀에 대한 연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녹색 푸른 줄기를 가진 밀의 귀, 분홍색의 녹색 샷 리본 같은 긴 잎, 먼지투성이의 꽃의 옅은 분홍색으로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는 귀, 줄기를 휘감은 분홍색 바인드위드. 그 위에 생생하지만 평온한 배경에 맞서 초상화를 그려야겠다.",사실, 두 점의 그림은 이 젊은 여성을 보여준다 : "농민 여성, 하늘색 리본이 매듭을 이룬 커다란 노란색 모자. . 

고희의 <일본 소녀>다. 1888년.  반 고흐의 삶과 자살의 선정적인 측면은 종종 그의 고도로 충전되고 표현적인 스타일 뒤에 있는 의도와 심의를 흐리게 한다. 그의 형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그림이 어떻게 그의 관심을 끌었는지 설명했다. "나는 일주일 내내 걸렸다.하지만 나는 무스메를 잘 하기 위해 정신 에너지를 아껴야 했다.",이 이름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인기 소설의 한 인물에서 유래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무스메는 일본 소녀, 이 경우 프로방살인데, 12세에서 14세 사이야." 소녀의 의상은 패턴과 파란색과 주황색의 보완적인 색조의 대조다. 이 대담한 줄무늬와 불규칙한 점의 페인트는 배경의 수직 및 수평 브러시 스트로크의 옅은 녹색 격자에 비해 두드러진다. 이 활기찬 패턴은 그의 젊은 모델에 대한 반 고흐의 동정적인 반응을 표현하는데, 그의 얼굴은 조심스럽게 모델링되어 그의 그림의 다른 부분들보다 더 큰 수준으로 완성되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손을 비교해보라. 그것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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