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로,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남쪽의 호치민시(사이공)가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라면, 이곳은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이다. 지형적으로 홍강 삼각주 안쪽에 있는 곳이라서 하노이(河內)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리타이또(李太祖, 1009~1028재위)의 의해 한 나라의 수도가 된 지, 1,000년이 되었기 때문에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시가지에 “하노이 고성”과 “리타이또 황제 동상”, 유교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묘”와 민족의 영웅인 호치민이 잠든 “호치민 묘”까지 있어 역사와 전통이 집대성되어 있었다.
또한 프랑스 식민지배기간에 건설된 오페라하우스 등 콜로리얼 건물들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해주었고, 호수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곳곳에 산재한 호수는 눈을 시원하게 해주며 휴식공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무질서한 것 같은 오토바이 행렬과 소음은 처음 보는 사람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거리는 복잡하고 혼잡하나, 교통사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할까. 겨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매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오토바이를 타는 여자들은 거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일행은 버스를 타고 바딘광장에 도착(16:45)했다. 그러나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과 같이, 오늘이 월요일이라 호치민 묘의 내부를 볼 수 없는 날이었다. ‘아무리 베트남 민족의 영웅이라지만 죽은 사람의 시체만 있는 묘의 내부를 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행을 하면서 정상을 눈앞에 두고 그냥 내려오는 마음이랄까. 막상 그곳에 올라가면 나무가 울창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정상을 밟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치민 묘와 바딘광장 중간의 풍경>
"호치민 묘(Ho Chi Minh Mausoleum)"는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만든 웅장한 3층 높이의 건물로 별다른 치장은 없고, 정면 상단에 쭈띡 호치민(호치민 주석)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었다. 묘 정문에는 근엄한 표정의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또한 묘역 앞에는 소철나무 79그루를 심었는데, 이것은 호치민이 살아있는 동안 79번의 봄을 맞이한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행은 그저 바딘광장에서 호치민 묘의 건물을 찍을 따름이었다. 이곳은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박 호(Bac Ho, 호 아저씨)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사망했다. 베트남전쟁동안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시신을 동굴에 숨겼으며, 옛 소련에서 시신방부처리 전문가를 데려와 1년여 동안 비밀리에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망한 지 4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시신의 상태가 양호한 것은 러시아에서 전문가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해 시신을 관리하기 때문이란다.
<하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지키는 "호치민 묘">
<호치민 묘 주위에 심은 79그루의 소철나무>
묘 앞은 바딘광장으로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호치민 주석이 1945년 9월 2일(날자는 사망일과 동일)에 ‘베트남 독립을 선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바딘광장은 원래 하노이 고성의 서쪽 출입문에 해당하던 곳인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는 동안 성벽과 출입문을 부수고 꽃 정원을 만든 곳이다. 바딘광장이라는 명칭은 1945년부터 사용하고 있으며, 168제곱m에 잔디를 깔아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잔디가 깔려 있는 호치민 묘 앞의 바딘광장 모습>
<호치민 묘 앞 바딘광장 풍경 >
<바딘광장에서 호치민 묘를 배경으로>
<바딘광장에서 본 하노이의 일몰>
해는 벌써 서산을 기웃거렸으나, 일행을 태운 버스는 문묘(공자를 모시며 공부하던 곳, 우리의 성균관과 비슷함)로 갔다((15:20). 이곳은 베트남의 역사와 함께 유교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리 왕조 3대 황제인 리탄똥(李聖宗)이 1070년 공자 사당으로 건설했으나, 4대 황제인 리년똥(李仁宗)이 1076년 국자감을 신설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변한 베트남 최초의 국립대학이었다.
문묘(文廟)의 첫 번째 출입문은 문묘문(文廟門)이었다. 출입문은 3개의 문으로 나뉘어졌다. 중앙은 황제 전용이고, 왼쪽은 무관, 오른쪽은 문관이 출입했다. 문을 지나면 잔디가 깔린 정원이 나오고, 아무런 글씨가 없는 두 번째 문을 지나면 안뜰이 나왔다.
<문묘의 첫 번째 문인 문묘문(文廟門)>
세 번째 출입문인 규문각(奎文閣)은 높다란 석조기둥에 겹 지붕을 얹은 누각이었다. 규문각을 지나면 천광정(天光井) 연못 좌우에 비석을 보관한 정자가 있었다. 거북이 등 위에 올라앉은 비석은 진사제명비(進仕題名碑)로 관리등용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과 고향이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이 비는 1448년부터 만들어졌으며 모두 116개였지만, 지금은 82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진사제명비의 거북이 중 검게 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시험을 잘 보게 해준다는 믿음에 따라 학생들이 만진 것이란다. 베트남에서도 우리와 같은 시험 중독증에 걸린 학생이 많은 것을 볼 때, 씁쓰름하기도 하지만 어디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운 정원과 세 번째 문인 규장각>
<규문각을 지나자 나타나는 연못 천광정>
<천광정 좌우에 거북이 위에 있는 진사제명비>
<진사제명비를 등에 업은 머리부분이 검은 거북이>
네 번째 출입문인 대성문(大成門)을 지나니 대성전(大成殿)이 나타났다. 문묘의 가장 중심이 되는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3명의 제자인 안회(顔回), 증자(曾子), 자사(子思)와 함께 맹자(孟子)를 모시고 있었다. 대성전 뒤쪽의 다섯 번째 안뜰은 국자감이 있던 자리였다. 국자감은 1946년 프랑스 군대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2000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문묘의 네 번째 문인 대성문 전경>
<문묘의 핵심인 대성전을 배경으로>
<대성전 앞의 제단>
<대성전 정중앙에 모셔진 공자>
<대성전 공자님 오른쪽에 모신 안회와 증자>
<대성전 공자님 왼쪽에 모신 자사와 맹자>
<제사 때에 사용되는 대성전에 있는 북>
일행은 문묘 탐방을 마치고 하노이 구시가지인 호안끼엠 호수 부근에 있는 호텔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옆 담장이나 시멘트 옹벽에 타일모자이크로 그림을 그린 것이 특이했다. 우리나라도 담장 등에 페인트로 벽화를 그린 곳이 있으나, 몇 년 정도 지나면 색깔이 바래는 흠이 있다. 그러나 춥지 않는 곳에서 타일모자이크로 그리면, 매번 물청소만 해주면 될 것 같았다. 일행은 큰길에서 버스를 내렸으나, 호텔로 들어가는 길이 좁아 200m정도를 큰 가방을 끌고 작은 가방은 메고 호텔로 가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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