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스멤링, 홀바인, 엘 그레꼬, 카라바조 , 부뤼갤, 카라치, 크라나흐 , 무릴로

boriburuuu 2019. 8. 19. 18:37

한스 멤링의 <수태고지>다. 1465-1470년. 이 당당한 그림은 선언문에서 가장 큰 생존 묘사 중 하나로, 페리 드 클루니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는데, 그의 가족 외투인 두 개의 합작 열쇠는 카펫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장식한다. 1465년 페리는 오툰의 생 라자레 성당에 채플 도레를 매장지로 세우고 아마 이 패널을 포함한 예술품으로 아낌없이 장식했다. 이 구성은 웨이던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다. 1464년 사망하기 전에 위임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멤링에 의해 그려졌는데, 멤링은 기술적 증거에 따르면 1465년 브루게스에 자리를 잡기 전 로지에의 브뤼셀 워크숍에서 여행자였다.

한스 멤링의 <토마소 디 폴코 포르티나리와 마리아 포르티나리(마리아 막달레나 바론첼리)>다. 1470년.  이 쌍의 특징에서 진실성과 이상화의 영리한 균형은 한스 멤링을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로 만들었다. 플로렌타인 토마소 포르티나리는 브루게스에 있는 메디치 은행의 지점장이었고, 아마도 1470년 멤링의 이 초상화들을 부부의 결혼에 의뢰했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성모와 아이의 중심적인 헌신적인 이미지로 삼부작을 형성했다. 마리아의 정교한 목걸이와 가운은 부부의 경건함을 보여주는 것 외에도 그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 멤링은 모델들을 환상적인 틀 앞에 놓는데, 이것은 그 수치들이 우리 공간에 투영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혁신이다. 

한스 홀바인의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의 초상>이다. 1532년.  한스 홀바인은 16세기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가 중 한 명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바젤의 저명한 상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커미션을 받았고, 나중에 토마스 모어 경을 포함한 영국의 강력한 후원자를 끌어 들였다. 홀베인은 로테르담의 위대한 인본주의자이자 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여러 장 만들었다. (반 길이 3/4 프로필로 보이는 그의 손은 코트의 모피 수갑 사이에 눈에 띄는 것으로, 에라스무스는 그가 약 60세였던 1530년경에 등장했을 때 묘사된다. 모델의 회색 머리털이 검은 모자 밑에서 삐져나오고, 깊은 선이 입 주위의 부위를 표시하고, 피부는 뭉툭한 턱 아래로 느슨해지는 기미를 보이지만, 에라스무스의 학구적인 정신의 민감성과 강렬함은 여전히 그의 날카로운 검은 눈에 풍부하게 드러난다. 홀베인과 인본주의자와 학자의 긴밀한 연관성은 이것들과 다른 감탄하는 초상화들뿐만 아니라 1526년 예술가가 영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에라스무스가 홀베인을 대신하여 쓴 소개 편지에도 반영되어 있다. 홀바인이 토마스 모어 경과 그의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위임받은 것은 에라스무스를 통해서였다. 이 패널의 왼쪽 상단에 그려진 흰색 라벨은 홀바인이 죽은 지 50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림이 존, 서리의 럼리 경, 런던의 수집품에 있을 때 만들어졌다.

한스 홀바인의 <헤르만 폰 웨디그 3세 >다. 1532년.  홀베인은 영국에서 두 번째 체류 기간(1532–43) 동안 길드홀이 런던 스틸야드에 위치한 한자연맹의 독일 상인인 새로운 고객을 위한 초상화를 만들었다. 반지가 쾰른의 웨디의 팔을 보여주는 모델은 아마도 29세의 나이에 묘사된 헤르만 폰 웨디 3세일 것이다. "진실은 증오를 낳는다"라고 쓰여진 전경의 종이에 적힌 라틴어 인용문은 휴머니스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로마 코미디인 테렌스의 안드리아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종이의 삽입된 슬립은 책의 내용을 참조할 수 있으며 아마도 모델의 개인적인 모토 역할을 했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음악가들>이다. 1597년.  큐피드는 카라바조가 음악을 대표하는 우화적 틀을 확인하는 반면, 예술가는 오른쪽에서 둘째 소년의 자화상을 포함한 현대 공연과 개별화된 모델에 동등하게 관여한다. 카라바조의 현대인 조반니 바글리오네는 이 화가가 그의 첫 번째 위대한 후원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의 집에 합류한 직후 "자연에서 묘사된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콘서트를 그렸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것은 같은 그림이며 카라바조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이름을 날린 반길이의 흙빛이지만 관능적인 인물들 중 하나이다.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부정>이다.  1610년.  카라바조 후기 작품들은 어두운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밝은 조명을 받는 지역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격정적인 삶을 살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려졌고 그의 혁명적인 스타일에서 극단적인 단계를 보여준다. 벽난로 앞에 서 있는 베드로는 예수의 추종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군인의 손가락과 여자의 손가락 두 개가 세 가지 비난과 피터의 세 가지 부인을 암시합니다.

엘 그레코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이다.  1608-1614년.  이 그림은 톨레도에 있는 침례교 성 요한 병원의 교회에 위임된 커다란 제단 조각이다. 성경의 구절인 계시록 (6 : 9-11)은 말기에 다섯 번째 봉인의 개통과 "하나님의 일과 그들이 지은 증인을 위해 살해된 자"에게 흰 예복을 배포하는 것을 묘사한다. 누락된 윗부분은 제5봉인을 여는 희생양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캔버스는 20세기 예술가들에게 상징적인 작품이었고, 파리에서 그것을 알고 있던 피카소는 그것을 아비뇽의 여인들의 영감으로 사용했다. 

엘 그리코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다. 1577-1587년.  스페인에서의 오랜 경력 동안, 엘 그레코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수많은 그림을 제작했다. 리먼 캔버스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그의 초기 버전의 주제가 아니라 서술 장면이다. 다른 인물은 대표되지 않으며 설정은 인식할 수 없다. 대신,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즉시성과 병변으로 공명하는 헌신적인 이미지다. 그리스도의 인류에 대한 기꺼이 희생은 십자가에 대한 온화한 포옹과 하늘을 향한 시선을 통해 표현된다.

엘 그레코의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푸는 그리스도>다.

 

엘 그레코의 <성가족>이다.

엘 그레코의 <게바라의 페르난도 니뇨 추기경 >이다. 1600년.  이 강렬한 초상화는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는 1596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여기서 그런 옷을 입고 있다. 1599년 그는 스페인의 조사관이 되었지만 1602년 사임하여 세비야 대주교로서의 남은 생애를 보냈다. 이 그림은 추기경이 필립 3세와 마드리드 법원의 일원과 함께 톨레도에 있었던 1600년 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엘 그레코는 베니스와 로마의 파르네세 궁전에서 살았는데, 티티안의 초상화(파르네세 교황 바오로 3세 등)가 그리스 화가에게 초상화의 심리적 가능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엘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이다.  1599-1600년.  반종교개혁의 열망을 가장 잘 나타냈던 화가로 종교화나 신화에 풍경이 등장하긴 했어도 순수하게 풍경에 몰두한 것은 이 그림이 유일하다. 극적으로 표현된 타고 강과 알칸타라 다리가 이곳이 16세기 스페인의 지적, 종교적, 에술적 삶의 중심지였던 톨레도임을 보여 준다. 성벽, 성당의 종탑, 알카사르가 톨레도의 거칠고 황량한 풍경을 굽어보고 있다.

엘 그레코의 <노인의 초상>이다. 1595-1600년.  엘 그레코의 솔직한 초상화는 (18세기처럼) 그의 다른 작품들이 호감을 잃었을 때에도 그들의 자연주의와 심리적 통찰력으로 일관되게 존경 받아왔다. 이 초상화는 1595~1600년경에 번갈아 받아들여져 수색 자화상으로 거부되었다. 비록 그 예술가의 문서화된 초상화는 없지만, 그는 그의 사진 중 일부 내에서 조연에 자신을 캐스팅한 것 같고 이것들은 현재의 모델와 어느 정도 닮았다.

피테르 브뤼겔의 <추수>다. 1565년. 이 작품은 네덜란드의 더운 여름날을 보여주고 있다. 앤트워프 상인 니클라에스 종엘린크가 교외의 집을 위해 의뢰한 시리즈에 속한다. 이 주기에는 원래 일년 중 시간을 보여주는 6점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 밀 추수는 하지를 전후한 6월 후반에 주로 이루어지는데 노란색에서 황토색으로 이어지는 온화한 색조는 여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 작품에서는 노동이라는 주제가 휴식에 대한 찬미와 연결된다. 화가는 4게절 연작에서 당시 농촌 생활의 단면을 포착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안니발 카라치의 <성모 대관식>이다. 1595년. 이 장엄한 그림, 즉 하늘을 향한 창문은 1595년 화가가 로마에 도착한 후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을 위해 그렸다. 그 속에서카라치는 자연광과 색의 영향에 대한 북 이탈리아의 민감성과 라파엘과 관련된 공간 조직과 이상화된 인물이라는 두 가지 이탈리아 회화의 흐름을 결합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은 제우스의 고대 로마 조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카라바조와 함께 카라치는 17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화가이자 고전주의 발전의 주요 인물이었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파리스의 심판>이다. 1528년. 크라나흐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작센의 선거인단의 유명한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와 그의 궁정 후원자들을 위한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가장 인기 있는 신화적 장면들 중에는 비너스, 특히 파리스의 심판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1528년경에 그려진이 사진은 아테네, 비너스, 헤라 등 세 여신 중 가장 공정한 여신을 심사숙고하면서 현대의 갑옷을 입은 파리스를 묘사한다. 머큐리가 근처에 서서 탐나는 상(여기서 유리 궤도로 변형된)을 들고 있는 동안, 큐피드는 비너스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어 사랑의 여신에게 유리한 파리스의 결정을 알린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릴로의 <성모자>다.  1670년. 종종 "산티아고 마돈나"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한때 마르케스 데 산티아고의 소유였는데, 그의 컬렉션에는 예술가의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무릴로의 성모와 아이 그림의 인기는 부드러운 모델링과 이 사진에서 마치 시청자의 존재에 대한 반응처럼 유아의 순간적인 간호로부터의 관심 전환 모두에서 분명한 친밀감과 달콤함의 질로 시간의 테마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무릴로의 <십자가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