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나트는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로 부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설법을 펼친 곳으로 불교에서는 초전법륜지라 부른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다는 수행시절 자신을 따르던 5명의 도반을 떠올리고 깨달음을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았는데 그들은 부다가 수타자라고 하는 소녀의 우유죽 공양을 받고 고행을 포기하자 변절자라고 멸시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걸어 오는 부다를 보고 무시하려 했으나 깨달은 자의 포스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청했고 부다는 첫 설법인 사성제의 팔정도를 전하게 된다. 그후 사르나트는 절대 성지가 되었으나 힌두교, 이슬람교의 득세로 쇠락했다. 1835년 영국 왕립 고고학회가 발굴에 성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멀리 다멕 스투팍 보인다.
부다가 다섯 도반에게 처음 설법한 곳에 세워진 기념탑으로 아쇼카왕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의 이름은 다르막사 스투파로 '진리를 보는 탑'이란 의미다. 지름 28.5미터, 기단을 포함한 높이가 33.53미터에 달하는 탑으로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1미터의 하단까지는 돌을 쌓고 그 위는 벽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하단은 마우리아왕조 당시의 것으로 상단은 굽타 양식이니 여러세기에 걸쳐 증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제 모습을 갖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스투파 외벽에 남아 있는 조각 문양들이다.
각국에서 온 불교 신자들이 초에 불을 붙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원래는 가운데 창문처럼 보이는 곳(8군데)에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물라간다 꾸띠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볼 뿐이다.
아쇼카 석주다. 정확히 말하면 석주의 밑동이다. 사르나트 사자상을 받치고 있었는데 사자상은 박물관에 있는데 사진은 금지다. 인도 각지에서 아쇼카석주를 볼 수 있는데 잔혹한 정복자에서 불교로 귀의한 후 부드러운 통치를 했던 아쇼카왕은 재위 기간 불교 유적지들을 방문한 기념으로 석주들을 남겼다.
아쇼카 석주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고고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수많은 힌두의 왕조들은 역사 기록에 소홀해 이 석주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불교 성지의 위치를 두고 갑론을박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10개 가량의 석주에는 왕명을 적은 조서가 새겨져 있어 당시 사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사르나트의 아쇼카 석주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불교 승단은 누구에 의해서도 분열되어선 안된다. 누구든 화합을 깬다면 흰 옷을 입고 승단에서 쫒겨나야한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미 아쇼카 시대에 이르러 불교가 여러 파벌로 분리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다마라지카 스투파의 자리다. 부다의 사리를 보관했던 사리탑으로 아쇼카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최초 건립 당시는 꽤 커다란 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괴된 이유는 1794년 바라나시 일대를 지배하던 마하라자의 궁전 건설 당시 건설 장관이던 자갓 싱이 건설 자재로 탑의 벽돌을 썼기 때문이다. 스투파의 벽돌을 해체하면서 아쇼카 아래에 보관하던 부다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을 제외하고는 갠지즈강에 던져버렸다. 사리함은 뉴델리 국립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스투파 앞에서 네팔에서 성지 순례온 스님과 한 컷.
모조품이지만 아쇼카 석주 위에 놓여 있던 사자상이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물라간다 꾸띠 비하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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