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바티칸 박물관 보르고 화재의 방

boriburuuu 2019. 9. 11. 17:32

보르고 화재의 방이다. 율리오 2세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다 레오 10세 시절부터 식당으로 용도가 바뀐 이 방은 1514년부터 1517년까지 라파엘로가 제자들과 함께 벽화 장식을 담당했다.  이 방 역시 제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보르고에 화재가 났을 때 교황 레오 4세가 신앙의 힘으로 불을 진압했던 사건을 그림으로 담고 있다. 이 그림은 당시의 성당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레오 3세의 선서>다. 799년 레오 3세는 전임 교황인 히드리아노 1세의 조카가 고위 성직자들과 공모한 반란으로 인해 간통죄의 누명을 쓰고 감금되었다. 위기의 순간 레오 3세는 서유럽의 샤를마뉴 대제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프랑크왕국의 고위층들에게 자신의 결백과 교황의 정통성을 천명한다. 정중앙의 레오 3세의 얼굴은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의 얼굴로 그려 넣었다. 그는 두 손을 성서에 놓은 채 선언을 하고 있다. 시종이 그의 삼중관을 들고 있다. 라파엘로는 제단 상단에 성직자들을, 하단에 세속의 기사들을 배치함으로써 교황의 우위를 천명했다.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의 <카롤로스(샤를마뉴)의 대관식>이다. 결백을 선언한 교황은 카롤로스 대제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칭하며 황제의 관을 수여한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재건축 이전의 성 베드로 성당을 배경으로 삼았다. 레오 10세의 얼굴을 한 레오 3세가 황제에게 관을 수여하고 있는데 황제의 얼굴이 당시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얼굴을 닮았다고 한다. 레오 10세와 라파엘로는 세속의 왕이 결국 교황에게 모든 것을 위임할 것을 그림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보르고 화재>다. 레오 4세가 재위하던 시절 847년 성 베드로 성당과 산탄젤로성 사이의 보르고 지역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왼쪽은 벌거벗은 남자는 막 담을 넘어 화마로부터 도망치고 있고 한 여인은 아이를 넘기고 있다. 오른쪽 기둥은 균열이 생겨 무너질 듯하고 물항아리로 불을 끄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아이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들이 다양한 자세로 고통을 드러내 보인다. 멀리 레오 4세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 하단 노인을 업고 나오는 청년은 트로이에서 아버지인 안키세스를 구하는 아이네아스다.  이 그림에는 사연이 있는데 어느날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를 본 라파엘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존경할 수 밖에 없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 학당에도 미켈란젤로를 그려 넣고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 답지 않게 모든 사람들을 근육질로(심지어 아이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너무도 바빴던 라파엘로가 이 방에서 유일하게 혼자 그린 그림이다.

 

 

 

 

 

라파엘로 산치오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오스티아 전투>다. 레오 4세 때 사라센 해적이 교황령인 오스티아 해안을 거쳐 로마로 이어지는 티베르 강의 하구까지 진격해오자 벌어진 전투 장면을 그린 것으로 나폴리 왕국의 도움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는데 원경에서는 로마와 사라센간의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고 중간쯤 사라센의 배가 침몰하고 있다. 그림 왼편 레오 4세와 성직자들이 승리를 신께 감사드리고 있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라센인의 뒤틀린 누드와 다양한 자세의 인체들은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의 솜씨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기독교 사회를 넘보던 투르크인들에 대한 레오 10세의 징벌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다른 그림들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천장화는 그당시 교황의 총애를 받아 다른 화가들이 그린 공간을 다 없애고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의뢰했었는데 이 보르고 화재의 방의 천장화만큼은 보존해 달라고 간청해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스승인 페루지노가 그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