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중국 시안

2일 병마용 2호갱, 3호갱, 화폐 전시관

boriburuuu 2019. 11. 4. 14:33

2호갱은 19764월에 발견되어 1989년에 개방되었다. 1호 갱에서 북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모양은 L자 형이다. 동서 길이는 제일 긴 쪽이 96m이고, 남북 길이는 84m이다. 깊이는 약 5m이고, 면적은 6,000이다.

2호 갱에서는 전차 89, 보병용 261, 기병용 106, 마용 562개와 청동 병기 수만 점이 출토되었다.

갱의 내부는 4개 부분으로 나뉜다. 1부분, 즉 동쪽으로 돌출한 부분에는 활을 손에 들고 꿇어앉거나 서 있는 노병용이 정렬해 있다. 2부분에는 마용과 전차가 정렬해 있다. 3부분, 즉 갱의 중심부에는 거병용 보병용 기병용이 뒤섞여 있다. 4부분, 즉 북쪽에는 수많은 기병용이 정렬해 있다. 이 때문에 2호 갱은 주력 부대를 보조하는 부대의 모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유적 중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후대에 판 우물이다. 같은 안내판에 도굴꾼의 흔적도 표시되어 있다. 한쩍 귀퉁이에 밝고 화려하고 현대적인 공간이 있는데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였다. (유료) 바로 옆 벽면에 2호갱을 재현해 놓은 모형이 있는데 채색되어 있는 모형을 보면 전체의 모습이 더 잘 이해된다.   









동쪽의 노병 진영의 외곽 부분에서 출토된 입사용이다. 화살을 메기는 동작으로 서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잇으며 높이는 178cm인 도용으로 궤사용과 반대로 머리 우측에 상투를 틀었고 갑옷을 입지 않은 간편한 복장의 보병용이다. 약 172개가 출토 되었다고 한다. 아직 극히 일부만 출토가 완료 되어 앞으로도 많이 나오겠지만. 다른 병마용들은 똑바로 서 있는데 반해 얼굴 표정부터 머리, 손, 다리 등 활을 쏘는 동작을 정지시킨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당시 뛰어난 공예기술을 잘 보여준다. 이는 또 2000여년전인 진시황 시절에 이미 표준화된 궁술이 만들어져 후세에 계승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토무기중 하나인 금구다. 검처럼 허리에 차서 휴대하는 반달모양의 칼로 주로 의장과 호위용 무기로 사용된다.(자세한 설명은 박물관에)


안마기병용이다. 2호갱에서는 116개의 안마용이 출토되었고 안마용 앞에는 기병용이 한개씩 세워져 있었다. 안마 기병용은 4개가 한조가 되어 나란히 배열되어 장방형 모양의 기병 진영을 이루고 있다.

안마용은 전투용 말의 실제 크기로(길이 2m,높이 1.72m) 생동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에는 굴레, 재갈, 고삐 등을 쓰고 있고 등에는 안장과 말다래가 걸쳐져 있으나 등자가 달려 있지 않아 당시의 말안장은 아직 초기 단계였음을 볼 수 있다. 안마기병용은 통상 180cm이고 한쪽 손에는 말고삐를, 다른 손에는 무기(활로 추정됨)를 쥐고 안마용의 앞에 세워져 있는데 머리에는 작은 원형 모자를 쓰고 승마 시 말 위에서 편리하게 활을 다루기 위해 양쪽어깨에 피박(어깨를 방어하는 갑옷 부분)이 없는 허리까지만 오는 갑옷을 입었고 하반신은 바지와 가죽 장화를 신었다.



진시황의 병마용은 크게 기병용과 보병용으로 나뉘고 기병과 보병은 다시 병사용과 군리용으로 나뉘는데 군리용은 다시 고급, 중급. 하급으로 나뉜단다. 군리용은 장군용인데 지금까지 총 10개 정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장군용은 전포를 입은 전포장군용과 갑옷을 입은 갑옷장군용이 있는데 이 장군용은 갑옷장군용이다. 머리에 갈관은 착용하고 체구가 우람하며 기질이 출중해 장군다운 면모가 저절로 느껴진다. 가슴, 등, 양쪽 어깨에 총 8개의 채색 꽃매듭이 장식되어 있어 계급, 신분과 위엄을 부각시키고 있다.

중, 하급 군리용으로 높이는 190cm이고 몸에는 긴 저고리위에 갑옷을 입었고 한쪽 손에는 검, 다른쪽 손에는 주먹이나 모(창), 궁(활)을 잡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하급 군리용들은 고급군리용(장군용)의 곁에 보좌관으로 세워져 있거나 병사 대열 중에 인솔자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특히 얼굴이 즐거워 보이고 생동감이 있다.


2호갱에는 출토된 병용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는데 특히 동쪽의 노병 진영 중심 부분에서 출토된 궤사용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활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높이 128cm인 도용이다. 머리 좌측에는 상투를 틀고 전포와 갑옷을 입었고 수량은 160개 정도란다. 특히 중국 지도 중 이 곳 섬서성의 지도와 외형이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머리부분은 황토고원, 몸은 중부의 관중 평원, 다리 부분은 남부의 진파 산중 부분과 거의 흡사하다고 하니 재미있다. 앞의 사진에서 보듯 병마용들은 대부분 파손되어 복구 및 수리가 필요했지만 오직 이 병마용만은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옷무늬와 머리 카락, 신발 밑바닥 바느질 자국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돈을 내고 병용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게한 공간인데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 보는 것으로 생략한다.










3호갱에 왔다. 19765월에 발견되어 1994년에 개방되었다. 1호 갱에서 서북쪽으로 25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모양은 요자凹字 형이다. 동서 길이는 17.6m이고 남북 길이는 21.4m이다. 깊이는 5.2~5.4m이고 면적은 524이다.

이곳에서는 4명이 승차할 수 있는 지휘용 전차 한 대, 마용 4, 병용 68개가 발견되었고 그밖에 출전하기 전에 점을 친 흔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뼈와 사슴뿔 조각이 발견되었다.

1호 갱과 2호 갱의 경우 병용과 마용들이 전투 대형으로 정렬해 있지만 3호 갱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형태로 정렬되어 있다. 이 때문에 3호 갱은 1호 갱과 2호 갱에 있는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본부의 모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휘본부로 추정되는데도 장군용이 없어 진시황이 사후에도 직접 통솔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3개의 병마용 갱에서 발견된 병마용들 가운데는 불에 그을려 목이 떨어져나가고 사지가 잘린 채 나뒹굴고 있는 것들도 많다. 이는 누군가에 의한 병마용갱에 대한 철저한 파괴 때문이었다.

병마용 갱의 파괴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첫 번째 설은 항우군사들의 화공설이다. 항우는 초나라 귀족 출신의 장수로 진시황이 초나라를 쳐들어왔을 때 할아버지와 숙부를 잃은 사람이다. 이 때문에 진시황제와 진나라에 대해 적개심을 지니고 있다가 진나라로 쳐들어온 후 부하들을 시켜 진시황릉 병마용갱 아방궁 등에 불을 놓아 파괴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장례식 때의 분소설이다. 당시에는 제물을 불에 태우면 그것이 죽은 자의 영혼이 사는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이라고 믿고 죽은 자를 위해 제물을 불에 태우는 의식이 성행하였다. 이런 관습의 영향을 받아 진시황의 장례식 때 부장품들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설은 양치기 목동이 횃불을 들고 굴을 따라 들어갔다가 실화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외에 메탄가스에 의해 자연 발화했다는 설도 있다.

병용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모두 진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기들은 발굴 당시 금속으로 된 부분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구리 주석 마그네슘 니켈 코발트 등 13가지 성분이 섞여 있는 금속을 사용한 때문이다. 특히 진시황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도금한 청동검 같은 경우, 발굴 팀이 실험을 해 보았더니 종이 뭉치를 단번에 자를 정도로 예리했다고 한다.

병용이나 마용은 원래 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가마에서 한 번 구은 후 표면에 투명한 아교를 칠하고서 주 담홍 심록 분록 심자 분남 길황백 등의 색으로 채색하였기 때문에 사실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으나 그 동안 탈색되어 현재에는 청회색으로 보일 따름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화폐전시관이었다. 당시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통일하며 단위를 통일했다. 길이와 부피, 무게 등의 기준이 중국 내에서 각각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진 않았다. 진나라는 다른 나라를 전쟁으로 정복해 통일을 이루었기에 기본적으로 반발이 심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도량형의 통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강력한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법을 통해 나라를 하나로 묶어가기 시작했고, 이를 어길 경우, 강력한 처벌로 다스렸다고 알려져 있다.

진나라는 통일국가라는 이름으로 15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통일된 도량형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나라가 멸망한 뒤 초나라와 한나라의 싸움 끝에 한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때 한나라는 진나라의 도량형을 이어 사용했다. 진시황의 강력한 법이 중국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동아시아의 도량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화폐의 통일이다. 그전에는 7개의 국가가 각기 다른 화폐를 사용했었는데 이를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다음은 고대 다양한 동전들의 모습이다.


































VR관이 있고 기념품샵과 푸드코트 등이 있었다.







 

시간이 좀 남아 1호갱의 병마용들을 만나러 다시 가 보았다. 언제봐도 압도적인 모습들이다. 다시 한번 한바퀴를 돌면서 머리속에, 마음속에 그들의 이야기와 모습을  저장한다.












'동북아시아 > 중국 시안'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일 화청지  (0) 2019.11.04
2일 진시황릉  (0) 2019.11.04
2일 병마용의 박물관  (0) 2019.11.03
2일 (10.17일) 병마용 1호갱  (0) 2019.11.03
1일(2019.10.16) 항공 이동 및 종루, 고루 야경  (0) 201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