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중국 시안

2일 병마용의 박물관

boriburuuu 2019. 11. 3. 19:18

다음으로 간 곳은 박물관이었다. 2호갱을 먼저 보려다가 아무래도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어 이곳을 먼저 택했다.


박물관안에도 역시 채색된 병용이 서 있다. 워낙 긴 세월이 흘러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터라 서비스 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전차모양도 원래의 모습처럼 만들어 놓은 복제품이다.


지하 전시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대형 죽간이 펼쳐져 있다. 한문을 읽을 수 없으니 원.

1978년 6월 21일 고고학자들이 진시황릉 봉토 서쪽 20미터의 위치에서 진시황릉 차마배장갱을 발견했고 1980년 12월에 대형 채색동차마 두대를 발견했다. 발굴 당시 앞뒤 배열로 한 목곽에 담겨져 있었으나 부패로 많이 파손된 상태였으나 도굴이 없어 잔편의 위치나 차마의 부속품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었고 3000개의 잔편들이 대부분 변형되었고 채색도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고학, 문물 보호 및 자연과학 방면의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2호 동차마는 1983년, 1호 동차마는 1988년 성공적으로 복구했다. 중국 국보급 문물로 지정되어 있고 출국전람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 와야만 볼 수 있는것이다.

실제 어용 차마 크기의 반으로 축소, 제작되었고 차양 및 가마 안밖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안이 채색되어 있으며 두대의 동차마에 총 14kg에 달하는 금, 은 장식품이 사용되었다. 장식품과 부품은 따로 주조된 후 용접, 상감, 경첩 연결, 스냅 연결 등 공예 기술로 완벽하게 조립된 것이다. 20세기 고고학사에서 발견된 처형이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온전하게 보존된 고대 청동기이며 진나라의 제련이나 청동기 제조기술 및 차량 구조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실 병마용의 마차들이 목재로 되어 있어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 동차마의 발견으로 그 형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드라마틱한 발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두 동차마는 바퀴 두개의 수레를 4마리 말이 끄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차마 전체에 채색이 되어 있고 푸른색, 녹색, 하얀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8마리 말은 하얀색으로 채색되었고 어관용의 얼굴과 손은 내층이 분홍색, 외층이 하얀색인 2층 채색코팅을 사용하여 피부질감을 실감나게 구현했다. 차체에는 하얀 바탕에 구름모양, 꽃모양 등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가 채색되어 있다.

아래는 먼저 발견되어 1호차로 불리는 입차다. 전체 길이는 225cm, 높이는 152cm이고 무게는 1061kg이다. 차수레는 장방형으로 3500개의 부품으로 조립되었고 금장식품 3000여 그램 은장식품 4000여 그램이 사용되었다.

주로 마름모, 체크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로 채색되었고 차난간 안쪽, 수레 앞 부분의 손잡이 표면, 우산 밑부분에는 각종 구름 무늬, 소용돌이 무늬등이 채색되어 있고 차수레에는 원형의 우산과 그 아래 마차를 모는 어관용이 있고 방패와 청동활, 화살촉등의 무기가 설치되어 있다. 사방이 활짝 드러나 있고 우산이 설치되어 있는 1호차는 전차 종류에 속하며 황제 출순 차량 행렬 중의 호위 차량에 속한다고 한다.



진시황 동차마 2호차의 고삐끈 말단에서 안차제일(安車第一)이란 4글자가 발견되었고 2호차를 안차라 부른다. 주로 후궁과 후비들이 사용하는 차량이라고 한다. 출토 당시 1555조각으로 파손되었던 2호차는 1983년 복원되었는데 전체 길이는 317cm, 높이는 106cm, 무게는 1241kg이다. 3462개의 부품으로 조립되었고 청동부품이 1742개, 황금 부품이 737개, 백은부품이 983개이다. 2호차의 차가마 부분은 전실과 후실 2칸으로 되어 있고 전실은 마차를 모는 병사의 자리로 꿇어 앉은 어관용이 세워져 있고 후실은 주인이 탑승하는 자리이다. 가마는 한가운데가 높고 사방이 점점 낮아지는 타원덮개가 있다. 차체는 용과 봉황등의 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테두리 장식은 구름과 기하학적 무늬를 사용해 제왕의 기세를 더 돋보이게 했다.









나머지 지하의 유물들은 함께 발견된 화살촉 등 무기류와 말을 장식한 여러 부품들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이것들은 이 유물을 발견하고 발굴할 때 썼던 용품들로 보인다. 귀중한 유물이고 많이 훼손되어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였다.





1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인만큼 향로 등이 많이 보인다.



각 유물의 벽에는 이렇게 사진으로 유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 놓은 것이 좋아 보였다. 학생들의 역사  교육용으로도 좋을듯하다.



기와에 구름 문양과 여러 기하학적 문양을 사용한 흔적이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모습들이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







중국에서도 상상속의 동물인 유니콘을 좋아했나보다.




여러 등잔과 편종 등이 보인다.


2000년전의 세공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진 통일 이전에 사용했던 화페 중 하나인 도편이다.















대부분의 향로가 발이 세개인데 이 향로는 4개의 발을 갖고 있어 훨씬 안정적으로 보인다.

병마용에서는 4만여점의 다양한 청동 병기가 출토되었고 표면은 짙은 회색이나 검은색을 보이고 윤이 나며 깨끗하다. 검사 결과 병기의 표면에서 방부, 방수 작용이 우수한 크롬산화층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독일이 1937년, 미국이 1950년에 특허를 낸 선진 공법인데 2000여년전의 진시황 시대에 이미 유사한 공법이 존재했고 사용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출토 병기중 하나인 과이다. 갑골 문자에도 기록이 있는 전국시대와 동한시기에 사용되었던 병기라고 한다. 형태가 낫과 비슷한 구병기로 주로 전차전에 사용되었고 날이 가로로 되어 있어 횡치기나 끌어치기가 기본 동작인 용법이다. 청동재질로 한, 두 들자의 주조연대나 감독자, 주조자 등이 새겨진 명문도 새겨져 있어 병기가 제조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호패 같은 것인가보다.


















































모와 화살촉이다. 모는 창의 전신으로 찌르는 무기에 속한다. 병마용에서 동과 철로 된 모병기가 5점 출토되었는데 길이 15-17cm 정도에 모양이 넓고 납작하며 깔끔하게 처리된 표면에 날이 예리하고 정교하게 제작된 병기 모는 강력한 실전 성능과 진 시대의 진보한 야금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기는 주나라의 5대 병기 중 2개를 차지할 정더러 사용되었으나 치명적 살상 무기라는 장점이 있으나 비교적 길어 민첩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점차 창으로 개량되었다.

출토병기 중 하나인 극이다. 1호갱에서 7자루의 청동극이 출토되었는데 나무는 썩었지만 극두는 새것처럼 빛났다고 한다. 공격용의 모와 수비용의 과를 결합한 공수 겸용의 복합식 병기이고 냉병기 시대에 아주 중요하게 사용된 무기이다.  

근위병 중 장군용이다.


















위의 무기는 피라는 무기인데 살상력이 아주 강력한 장병기였고 길이가 35cm 정도인 이 무기는 예리한 검처럼 생겼고 노끈으로 타원형 나무 자루에 묶여져 있어 전체 길이는 3.5-4m에 달한다고 한다. 한때 유행했던 병기이나 피두 부분의 형태가 단검과 비슷해 오인되다가 온전한 피가 출토된 후에야 고대 문헌기록 중의 장병기인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호갱에서 16자루의 장피가 출토되었고 두건을 쓰고 군진 양쪽에 집중적으로 세워졌고 대칭된 작전 단위를 형성했다.

아래쪽의 무기는 1호갱에서 발견된 금구다. 허리에 차는 반달모양의 구부러진 칼로 오나라에서 처음 발명해 오구라고 부른다. 금구 양면에 모두 날이 있고 손잡이와 몸체 부분으로 나뉘며 검, 칼과 같이 단병기와 단거리병기에 속하며 주로 의장과 호위용 무기에 사용된다. 2점의 금구가 발견되었는데 칼날 부분이 없는 것으로보아 전투용이 아닌 의식용으로 추측하고 있다.


청동검이다. 24자루의 청동검이 출토되었는데 표면에 크롬산화처리를 해 출토 당시 여전히 날카로웠다. 열처리한 충탄소강과 비슷한 경도에 얇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 검들은 76.39%의 구리, 21.38%의 주석 합금으로 13가지의 미량 원소들도 함께였다. 춘추전국시대에 비해 진나라는 검심이 좁아지고 두께도 얇아졌으며 길이는 길어졌다. 병마용의 청동검은 주조 성형된 후 칼날 부분에 촘촘한 무늬결은 평행되어 있고 교차현상이 없어 간단한 기구를 이용해 가공되었고 이미 기계가공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도상 페검과 병검을 나뉘는데 페검은 예의와 신분의 상징이고 병검은 전쟁 및 방위에 사용된다.

1호갱을 보고 나서 나는 바로 박물관으로 왔다. 일행들은 서로 보다가 2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한터라 느긋하게 박물관을 두바퀴 둘러보고 병마용들 앞에서 사진도 찍고 쉴겸 한참을 보고 있다가 제주댁을 만났다. 이미 1,2,3호갱과 동전관까지 모두 봤다는 것이다. 10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안되겠다 싶어 박물관을 나와 나머지 구역들을 돌아보고 나니 12시가 되었다. 약속 시간을 좀 더 앞당길까하고 전화를 해보니 아직 다들 못봤다는 것이다. 해서 다시 박물관을 돌아보기도 하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나중에 만나니 이미 점심으로 스파게티와 빵등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안에 푸드코트를 보면서도 함께 먹어야해서 참았는데 정말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밖에 식당에 가서도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점심을 먹으라는데 그냥 옥수수 하나 먹고 말았다. 먹는데는 정말 관심이 적은 나지만 아침, 점심에 옥수수 하나를 먹고 여행하는 것은 정말 불편한 일이었다. 서로 전화 연락이 가능한데 안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는 배려 같은 것은 머리에 프로그램조차 되어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과의  동행이라니.


발굴되자 채색이 다 날아가버렸다는데 지금의 기술로는 채색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채색이 남아 있는 병용의 두상이다. 그 많은 병용들이 헤어 스타일과 얼굴 모습, 옷차림 등이 다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대단하다.




























 궤사용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활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높이 128cm인 도용이다. 머리 좌측에는 상투를 틀고 전포와 갑옷을 입었고 수량은 160개 정도란다. 특히 중국 지도 중 이 곳 섬서성의 지도와 외형이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머리부분은 황토고원, 몸은 중부의 관중 평원, 다리 부분은 남부의 진파 산중 부분과 거의 흡사하다고 하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