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의 <의회의 집(안개의 효과)>다. 1903-4년. 1899년에서 1901년 사이에 모네는 런던의 템즈강의 그림을 거의 백 개나 볼 수 있었다. 그는 사보이 호텔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워털루 다리와 채링 크로스 브리지를 그리고 강 건너편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서 의회 하우스를 그렸다. 예술가는 1903년까지 그의 딜러인 두랜드에게 편지를 쓸 때까지 그림을 계속 다듬었다. "나는 런던의 캔버스를 떠날 수 없다. 그것들을 모두 내 앞에 두는 것은 필수적이며,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무도 확실히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함께 발전시킨다.",1904년 파리의 듀란드-루엘 갤러리에서 이 작품과 36점이 전시되었다.
클로드 모네의 <생 타드레스의 정원>이다. 1867년. 정원에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고모와 아버지일 것이고 서 있는 두 사람은 아마도 모네의 사촌과 고모부일 것이다. 멀리 수평선에 르 아브르 항구 인근의 수많은 배들이 보이고 육지 가까이는 고기잡이 배들이 어촌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모네는 '빛과 색채에 대한 연습'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것들에 공을 들이면서 화폭에 옮겼는데 그로 보면 지금은 아침이다. 자유로운 붓질과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를 이용해 진동하는 빛의 효과를 나타냈고 이는 청록색으로 그려진 바다에서 잘 드러난다.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의 그림은 공간감이 아니라 평면과 나란히 진행되는 세 개의 수평선을 나눌 수 있는데 이 기법은 모네를 위시한 인상주의자들도 감탄했던 일본 판화에서 나온 것이다.
클로드 모네의 <망소 공원>이다.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세느강>이다. 1880년. 모네는 파리 외곽의 베테유일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의 세느 강 상공에서 변화하는 하늘을 환기시키기 위해 다양한 붓놀림과 단순화된 수평 형태를 실험했다. 이 그림이 만들어 졌을 때, 1880년대 초, 모네는 색 조합, 붓질, 표면 효과 및 구성 배열의 스타일리시한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인상파의 지도자로 유명했지만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여전히 강했다.
클로드 모네의 <풍경. 망소 공원에서>이다. 1876년. 파리의 대로 드 쿠르셀레스에 자리잡고 유행하는 마을 주택으로 둘러싸인 파르크 몽소는 18세기 후반에 영국 정원의 형태로 계획되었다. 모네는 1876년 봄에 공원의 세 가지 경치를 그렸다. 1877년 인상파 전시회에서 보여지는 이 전시회는 녹색 풀과 꽃이 피는 나무의 스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그림에서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박물관 소장품을 포함해 1878년부터 두 작품에도 등장한다.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풍경>이다. 1880년.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여름>이다. 1880년.
클로드 모네의 <퐁텐블로 숲의 보드머 오크나무>이다. 1865년. 파리 남쪽의 폰테인블로 숲은 1830년대에 예술적 핫스팟이 되었다. 한 가지 인기 있는 모티브는 1850년 살롱에서 나무 그림을 전시한 스위스 예술가 칼 보드머의 이름을 딴 보드머 오크였다. 모네는 밝은 노란색, 녹색, 오렌지를 사용하여 가지 캐노피를 통해 햇빛이 여과되는 것을 묘사했다.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근처의 센 강의 아침>이다. 1897년. 1896년에 시작된 모네의 모닝스 온 더 세느 시리즈는 악천후로 인해 1897년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강을 따라 참을성 있게 전망을 관찰한 모네는 떠다니는 스튜디오로 개조한 배에서 그림을 그렸다. 오랜 기간 동안 그는 해가 뜨면서 빛의 변화하는 효과를 그리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스튜디오에 있는 이젤에 캔버스를 줄을 세워서 그것들을 시리즈로 완성했다.
클로드 모네의 <바람 부는 날, 포플러 나무들 연작>이다. 1891년. 여름과 가을 1891년 모네는 지버니의 엡테 강을 따라 포플러의 일련의 풍경을 그렸다.이 시리즈의 완성은 Giverny에서 Epte를 가로 질러 Limetz 마을이 경매에서 나무를 팔기로 결정했을 때 일시적으로 위협 받았다. 모네는 일을 마칠 때까지 나무들이 서 있도록 하기 위해 지역 목재 상인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는 강둑에서 찍은 사진들 중 일부를 그렸고, 이와 같은 사진들은 여러 개의 캔버스를 담을 수 있는 홈이 특별히 갖춰진 보트에서 그렸다. 헤이스택스처럼 포플러스는 시리즈로 처음 전시되었다. 1892년 파리에서 15점이 전시되었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의 다리>다. 1899년. 1893년 열정적인 원예가인 모네는 지베르니의 재산 근처에 연못이 있는 땅을 구입하여 "눈의 즐거움과 모티브가 그려질 수 있는"것을 만들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수련 정원이 나왔다. 1899년, 그는 연못 위의 나무 다리의 18개의 전망을 일련의 18개 보기로 시작하여 그 해 여름 현재 그림을 포함한 12개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 시리즈에서 특이한 그림의 수직 형식은 수련과 연못에 반사된 모습을 두드러지게 한다.
클로드 모네의 <건초 더미: 눈과 해의 효과>다. 1891년. 1890년에서 1891년 사이에 모네는 지베르니니에 있는 그의 집 근처의 들판에 있는 건초더미에 약 3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노력의 와중에 그는 비평가 구스타브 제프로이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여러 가지 다른 효과 (헤이스택)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이 시즌에는 해가 너무 빨리 지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계속할수록 내가 추구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Haystacks는 모네가 시리즈로 전시한 최초의 그림 그룹이었다. 1891년 파리의 Galerie Durand-Ruel에서 15개가 전시되었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다. 1916-1619년.
클로드 모네의 <보디게라의 야자 나무>다.
클로드 모네의 <얼음꽃>이다. 1893년. 1892-93년 겨울의 장기간의 동결과 폭설로 모네는 지버니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유리한 지점을 선택한 일련의 그림에서 세느 강에 대한 영향을 포착하게 되었다. 강은 1월 중순에 얼었지만 23일에 해빙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그의 딜러인 듀란드 - 루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해빙이 너무 빨리왔다.,...... 결과 - 단지 4, 5개의 캔버스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월 말까지 그는 녹는 얼음 플로의 이 견해를 포함하여 12점 이상의 그림을 완성했다.
클로드 모네의 <베르농 근처의 오티>다. 1897년. 네틀 섬의 오티는 자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모네는 현재 강둑에 합류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보트를 세를 냈다. 그는 1897년에 서명되고 날짜가 지정된 이 그림의 4 가지 버전을 그렸다. 설정과 그 대부분은 물의 같은 거리를 따라 일년 내내 완성된 일련의 뷰 중 하나인 지베르니 근처의 세느 강에서 아침을 보내는 것과 유사하다.
클로드 모네의 <루앙 대성당:햇볕>이다. 1894년. 모네는 1892-93년에 루앙 성당의 30여 개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하루가 지날수록 한 캔버스에서 다른 캔버스로 옮겨가면서 조각된 돌의 면을 전달하고 대기와 빛을 뚜렷하게 만드는 매우 질감 있는 붓놀림으로 외관을 그렸다. 모네는 나중에 지베르니의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완성하여 독립적으로 그리고 서로 관련하여 사진을 조심스럽게 조정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서명과 날짜는 1894년으로, 이 예와 같다. 1895년 모네는 파리의 갈레리 듀란드 루엘에서 성당 그림 20점을 전시했다. 이것은 Le Portail(솔레일), 또는 The Portal(태양)이라는 제목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아이리스 사이로 난 길>이다. 1914-1917년.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다. 1919년. 모네의 비평가 중 한 명은 1919년의 이 캔버스를 "풀 꽃에서"그들 스스로 주장하고 있다. 구름이 많은 물에 보라색으로 싸인 황금 원반. ",거의 80세의 이 예술가는 최근의 그림들과 헤어지는 것을 꺼렸지만, 그는 그의 딜러인 개스톤과 조세 베른하임에게 "열정적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풍경과 세 장의 관련 사진을 시장에 시선을 두고 만들었다. 베른하임 형제는 재빨리 4개 작품을 구입했다.
클로드 모네의 <아르젠티유 근처의 양귀비 들판>이다. 1875년. 이 작품은 1875년 여름 모네가 아르젠테유의 남동쪽에 있는 게네빌리에스 평야의 네 가지 비슷한 그림 중 하나이다. 그는 2년 전 아르젠테유일(파리 무세 도르세이) 근처의 유명한 포피에서 이 주제를 처음 그렸다.
클로드 모네의 <그린 웨이브:초록 물결>이다. 1866-67년. 이 초기의 바다 풍경이 1879년 인상파 전시회에서 데뷔했을 때, 비평가는 "마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색칠과 구성, 특히 높은 지평선은 마네의 미국 군함 묘사, 불로뉴의 "Kearsarge"(1999.442)와 "Kearsarge" 전투와 "Alabama"(필라델피아 미술관)를 반영하고 있는데, 모네는 1865년과 1867년 파리에서 전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중에, 그리고 잘못하여 현재의 작품을 1865년까지 날짜를 정했다. 사실, 그는 1866년과 1867년에 노르망디 해안을 방문했다.
클로드 모네의 <아르젠퇴유 정원에 있는 까미유 모네>다. 1876년. 모네는 아르젠테유일에서 임대 주택과 정원의 그림을 10점 이상 만들었다.이 캔버스는 그가 "좀 흥미로운 새로운 것들"을 작업하던 6월에 그린 캔버스 중 하나일 것이다.",모네 부인은 작곡 중간에 있는 홀리호크의 인상적인 스탠드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 같다. 밝은 색의 페인트를 찰싹찰싹 붓질하는 것은 캔버스가 빛으로 맥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클로드 모네의 <목마를 타고 있는 아들 쟝>이다. 1872년 모네는 1872년 여름 프랑코 - 프러시아 전쟁 중 스스로 망명한 후 프랑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남 장의 그림을 그렸다. 딜러 폴 듀란드-루엘의 노력 덕분에 화가의 재정이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한때 빈곤했던 모네츠가 파리 북서쪽의 쾌적한 교외인 아르젠테유일에 집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이 초상화를 위해 모네는 다섯 살짜리 쟝을 새 집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모네는 그 그림을 전시한 적이 없지만 평생 간직하고 있었다
클로드 모네의 <라 그레누이엘레르>이다. 1869년. 1869년 여름, 모네와 르누아르는 파리에서 멀지 않은 센 강에 있는 보트와 목욕 리조트인 라 그레누이엘레에 이젤을 세웠다. 모네는 9월 25일 "나는 꿈, 그림, 라 그레누이엘레르의 목욕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목욕물은 내가 나쁜 스케치를 몇 개 만들었지만, 그것은 꿈일 뿐이다. 여기서 두 달을 보낸 르누아르도 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묘사 중에서,이 구성은 스톡홀름 국립 박물관의 르누아르와 매우 흡사하다.
클로드 모네의 <봄: 꽃이 핀 과일 나무>다. 1873년. 모네는 인상파 화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임 장소였던 파리 북서쪽 세인의 마을 아르젠테유일의 집 근처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장면은 이전에 블룸의 플럼 블러섬과 애플스 트리라고 불렸지만, 나무의 유형은 예술가가 불러 일으킨 흰 꽃봉오리의 흩날림에서 결정될 수 없다 봄의 파스텔 색조와 맑은 빛은 그에게 거의 순수하게 자연을 표현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1926년 유서를 통해 박물관 소장품에 들어간 모네의 첫 번째 그림이었다
클로드 모네 의 <만네포트(에트레타트)>다. 1883년. 모네는 1883년 2월 노르망디 해안의 낚시 마을이자 리조트인 에트타트에서 가장 많이 거주했다. 그는 해변의 20개의 전망과 이 지역의 세 가지 특별한 바위 형성을 그렸다 : 포르트 다발, 포르트 다몽 및 만네포트. 멘네포트에 작렬하는 태양빛은 예술가가 클리프를 거의 독점적으로 색상과 루미노 성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10세기 방문객들은 자연의 광경으로 바위에 매력을 느꼈다. 모네는 대신 하루에 다른 시간에 자신의 변화 인식에 중점을 두었다.
클로드 모네의 <정원에 앉아 있는 카미유 모네>다. 1873년. 모네의 아내 카밀 돈시외는 아르젠투일 부부의 집 정원에 있는 제라늄 덩어리처럼 쉽게 이곳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스마트 앙상블도 마찬가지다. 벨벳과 다마스크 의상은 패션 정기 간행물인 La Mode Illustré의 3월호에서 광고된 것처럼 1873년 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장면의 본질은 명확하지 않다.카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그려진 그녀는 장갑 낀 손에 쪽지를 들고 슬픔을 전한다. 나중에 이웃으로 알려진 이 토프타인 신사는 아마도 조의를 표하고 위로의 꽃다발을 바치라고 전화했을 것이다.
클로드 모네의 <베테유 근처의 le aux Fleurs>이다. 1880년. 이것은 1880년 여름에 모네가 그린 베테유 근처의 세느 섬인 le aux Fleurs의 두 가지 작품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약간 더 큰 버전이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에 있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형식상의 문제가 예술가의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빠르게 깜박이는 붓놀림은 전경에 강한 패턴을 만들어 공간의 환상을 감소시키고 도색된 표면의 추상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클로드 모네의 <닥터 레클렌체의 초상.이다. 1864년. 모네의 아들 미셸은 이 작고 비공식적인 초상화의 모델을 예술가의 주치의인 레클렌체 박사로 확인했다. 1864년 모네가 여전히 그림 화가로서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야한 교차 다리에서부터 태연하게 왼손에 들고 있는 시가에 이르기까지, 그 닮은 점이 표현적인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다. 약간 과장된 그의 몸짓은 캐리커쳐리스트로서의 모네의 젊은 스틴트 덕분일 것이다.
클로드 모네의 <생트 어드레스의 레가타>다. 1867년. 모네는 노르망디 해안의 르 아브르의 잘된 교외인 생트 - 어드레스에서 1867년 여름을 보냈다. 6월 25일, 그는 "해경 동안 해변과 바깥 항구에 작게 보이는 많은 인물과 함께 르 아브르의 레가타를 그리고 있다"고 기록하면서 20개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입은 부르주아가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이 화창한 레가타는 낮은 타이드에서 과다 캐스트 장면인 생트-어드레스의 비치와 쌍으로 받아 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낚시 보트가 해변으로 올라갔고, 사람들과 함께 선원과 노동자들이 보인다. 구름과 물이 특이하다.
클로드 모네의 <국화>다. 1882년. 열렬한 정원사인 모네는 1878년에서 1883년 사이에 약 20개의 꽃무늬 정물화를 생산하여 비판적,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두었다.이 그림은 1883년 파리의 갈레리 듀란드-루엘에서 박물관의 해바라기 부케(29.100.107)와 함께 전시되었고, 1886년 브뤼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서클 레스 XX와 함께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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