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프란시스코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

boriburuuu 2020. 10. 8. 23:24

프란시스코 고야의 <분리된 링에서의 투우>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발코니의 마하들>이다.

프란치스코 고야의 <바위위의 도시>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페피토, 코스타 이 보넬리스의 초상>이다. 1810년.   군인의 유니폼을 모방한 이 아이의 정교한 의상의 눈부신 백인들은 그를 장난감으로 위장한 추가 군사 참고 문헌, 즉 고정된 총검이 달린 말, 드럼, 소총과 구별했다.이 특별한 초상화는 1810년 직후 고야가 그린 작품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스페인 독립전쟁을 암시하는 것 같다. 페피토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모델의 아버지 라파엘 코스타 데 퀸타나는 페르디난트 7세의 의사였다. 그의 어머니는 제이미 보넬스의 딸이었고, 알바 가문의 의사였으며, 고야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돈 마누엘 오소리오 만리케 데 주니가의 초상>이다. 1787-1788년.  알타미라 백작의 주문으로 그려진 가족 초상화 중 하나로 1784년에 태어난 소년은 우아한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단색조의 배경에서 단연 돋보인다. 아이는 까치를 묶은 끈을 잡고 있는데 까치의 입에는 고야의 이름이 적혀 있는 초총장이 물려 있는데 그림에 서명하고 싶은 화가의 마음이 드러난다. 새는 예수가 손에 들고 있거나 덫에 걸려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 되었는데 죽음의 순간에 육신을 떠나는 인간의 영혼을 주로 상징했다. 세마리의 고양이는 악마, 어둠, 악 등을 의미해 인간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악마의 유혹을 암시하고 아이의 끈은 소년의 순수한 세계와 그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 사이의 경계를 가르고 있다.

프란치스코 고야의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이다.  16세의 아스투리아스 왕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황금 플리스 훈장, 프랑스 부르봉 성령 훈장, 스페인 찰스 3세 훈장의 사시를 입고 있다. 한때 사본으로 여겨졌던 이 사진은 이제 고야의 유명한 찰스 4세(마드리드 무세오 델 프라도) 가족 초상화의 원작, 본격적인 오일 스케치로 간주되고 있다. 그 작품에 대한 다른 생존 연구와 마찬가지로, 흉상과 의상이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 머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 후 다른 예술가는 그것을 완성한 모습으로 하고 타원형의 주변을 그렸다.  

프란치스코 고야의 <알타미라 백작 부인과 그의 딸, 마리아 아구스티나 >다. 1787-88년.  이 당당한 초상화는 고야가 알타미라 백작의 가족 구성원들로 그린 네 장 중 하나이다. 이 강력한 가족의 후원은 예술가의 경력을 크게 발전 시켰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직후 그는 스페인의 왕인 찰스 4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고야가 빛나는 수놓은 실크로 백작 부인의 가운을 훌륭하게 대하는 것은 그의 기술의 숙달성을 증명하는 반면, 시터들의 멀고 내성적인 표현은 가장 형식적인 초상화에도 침투하는 심리적인 즉각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드러낸다.

고야의 <티부르시오 페레즈의 초상>이다. 1820년.  페레즈의 느슨하게 말린 소매, 즉 화가다운 투어 드 포스, 그리고 긴장을 풀고 있는 표현은 고야의 거의 단색 팔레트와 결합하여 화가의 절친한 친구인 건축가 티부르시오 페레즈의 유난히 직접적이고 비공식적인 초상화를 만들어낸다. 바로 그 전 해에 고야는 페레즈의 삼촌, 건축가이기도 한 삼촌을 오늘날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훨씬 더 섭정적이고 전통적인 초상화로 그렸다. 페레즈는 마드리드의 여러 기관 건물 설계를 담당했으며, 여기에는 아토차 의과대학이 포함되어 있다.

벨라스케스의 <아마도 자화상으로 보이는 남자의 초상>이다. 1635년.  이것은 아마도 예술가의 소유물 목록에서 나열된 "디에고의 초상화, 완성 될 옷"일 것이다. 이 모델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 항복(마드리드 주 무소 델 프라도)에 나오는 인물과 관련이 있다. 학자들은 화가가 그러한 역사적인 군사적 승리에 감히 구경꾼으로 자신을 포함 시켰을 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며, 살아남은 증거는 그가 더 큰 작품을 위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구성의 인물이 예술가라면 이와 같은 준비 단계는 벨라스케스가 그 큰 그림으로 자신의 유사성을 옮기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을 것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마리아 테레자의 초상>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후안 데 파레하>이다.  1650년.  무오계 세비야 사람이었던 벨라스케스의 노예 파레하는 기지를 발휘해 왕의 도움을 얻어내고 곧 자유의 몸이 된 인물로 거의 오만해 보일 정도로 고귀하고 깊고 엄격해 보이는 눈과 자신만만한 표정, 품위 있는 자세 등 고전적인 스타일로 그려졌다. 레이스 칼라는 노예들에게 금지였고 벨라스케스도 잘 착용하지 않던 것이어서 특별해 보인다. 1650년 이 그림이 로마의 판테온에 전시되었을 때 한 그림 전문가가 "전시장의 다른 그림들은 모두 예술이다. 그러나 오직 이 한 그림만이 진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인간 영혼의 깊은 곳까지 섬세하게 해석한 그림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다. 1622-1623년.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필리페 4세의 초상화>다. 16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