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첼은 처음에 프란츠 쿠글러의 역사책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1840)에 삽화를 그려 넣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프로이센을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든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중적인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멘첼의 명성은 가정의 실내정경을 묘사한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스케치 연작들과 1840년대에 그려진 풍경화에 의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동시대 멘첼의 명성은 다수의 역사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역사화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다룬 작품들도 포함된다. 주제에 있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접근법과 섬세한 빛의 연출로 인한 매력이야말로 왜 멘첼의 그림이 형식적인 면과 주제적인 면 둘 다에 있어서, 인상주의를 예고한 그림으로 평가받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18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멘첼은 점차 '근대적인 주제'로 불리는 것들에 끌리게 된다.
아돌프 멘첼의 <1757년 루이덴 전투 전의 위대한 장군 프레드릭>이다.
아돌프 멘젤의 < 기사(더 걷기) >다. 1849년.
아돌프 멘젤의 <포츠담 상수시 궁전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공연>이다. 1848년.
아돌프 멘젤의 <젊은 아돌프 멘젤의 초상화 >다. 1839년.
아돌프 멘젤의 <프레데릭 아놀드의 초상화>다. 1845년.
아돌프 멘젤의 <비둘기를 잡는 매> 다. 1844년.
아돌프 멘젤의 <집 뒤의 전망>이다. 1847년.
아돌프 멘젤의 <클라라 일그너(나중에 슈미트 폰 노벨스도르프 부인) >이다. 1848년.
아돌프 멘젤의 <1859년의 전투>다. 1859년.
아돌프 멘젤의 <김나제 극장>이다. 1856년.
아돌프 멘젤의 흉상이다.
아돌프 멘젤의 <말의 습작말 연구, 머리가 깔려 있고, 접시 안에 >이다. 1848년.
아돌프 멘젤의 <손의 습작> 이다.
아돌프 멘젤의 <1870년 7월 31일 윌리엄 1세 왕이 군대로 출발 >이다. 1871년.
아돌프 멘젤의 <무도회 만찬>이다. 1878년.
아돌프 멘젤의 <윌리엄 1세 대관식에서 쾨니히스베르크(스키제)>다. 1861년. 50년 후인 1865년 12월 말, 멘젤은 132개의 초상화를 가진 쾨니히 스 베르크 성 교회에서 윌리엄 1세의 대관식의 위대한 그림을 완성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논란이 많은 권위의 표현이었고 역사 이미지의 특성을 취하고 결국 생리 객관성은 초월적 의미에 대한 주장을 가로 지르는 현대 의식 이미지다.
아돌프 멘젤의 <예술가의 발>이다. 61세 때 자신의 발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1876년.
아돌프 멘젤의 <제철 공장>이다. 1872-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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