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베를린 국립회화관

필리포 리피와 산드로 보티첼리

boriburuuu 2020. 10. 11. 12:46

리피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도제 생활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사초와 도나텔로 영향을 받아 작업했고 나중에는 프라 안젤리코의 영향을 받았다. 리피의 작품 역시 제자인 보티첼리에게 영향을 미쳤다. 필리포 리피는 그림에 네덜란드식 세부묘사를 결합한 최초의 이탈리아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매우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아름다운 <성 프레디아노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1437)에서도 나타난다.

프라 필리포 리피의 < 마리아, 요한의 봉헌과 성 베른하르트 / 숲에서의 예배와 함께 아이를 숭배함>이다. 1459년경

위는 필리포 리피의 <젊은 여인의 초상>1445년.

 역시 필리포 리피의 <성 암브로시우스의 벌의 기적>이다. 1441 - 1447 년.

필리피노 리피의 <성모자>다. 필리피노 리피는 필리포 리피의 아들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다. 1490년.  보티첼리는 초기 르네상스의 뛰어난 화가로 주로 피렌체의 공방에서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역사, 신화, 종교 작품과 초상화를 제작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초청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두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이다. 1485년.  이 제단 판넬은 보티첼리의 가장 세심하게 칠하고 가장 잘 보존된 그림들 중 하나로 플로렌스의 상인 지오반니가 장례 예배당을 위해 의뢰한 것이다. 주제인 성도들이 옆에 서 있는 마돈나는 성 요한과  세례 요한과 함께 있다. 보티첼리는 건축 구조를 줄이고  단풍은 이전의 3중 3중 재생 가능한 타입을 암시한다.  자연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정교한 개념 사이의 이러한 긴장감은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의 눈, 이미지로 이어지는 계단에 성도를 배치하는 것, 또는 우리가 그림 밑에 있다고 상상하는 제단 위의 작은 십자가상 등 관람자와 거리를 두는 요소들에 의해 잘 제공된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성 세바스티아노>다. 1474년.  로마 장교 세바스찬은 디오 클레 티아누스 황제의 보디 가드 역할을 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해야 했다. 그가 거절했을 때, 그는 나무 줄기에 묶여 있었고 이미지의 배경에 보이는 제국 궁수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화살은 그의 몸을 관통했지만 그는 처형에서 살아 남았다. 그래서 페스트가 창궐할 때 병든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젊은 여인의 초상>이다. 1475-1480년.  이 초상화는 1476년에 사망한 귈리아노 드 메디치가 존경하는 시모네타 베스쿠치 의 초상화로 간주되었다. 환상적인 헤어 트레치는 보티첼리의 신화적 표현에서 여성 인물을 연상케하며 이상적인 이미지라고 말한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노래하는 천사들과 함께하는 성모자>이다.  이 원형 그림이 예전에 피렌체에 있는 S. 프란체스코 형제들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리아는 왕관에 의해 천국의 여왕으로 동일시되지만, 동시에 그녀는 희생자로 지목된 아기  그리스도의 어머니다. 예수는 마리아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신학자들은 마리아를 모든 인류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구원의 어머니로 보았다. 노래하는 천사들은 순결의 상징으로 손에 백합을 들고 그녀를 찬양하고 있다. 지상의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이 항상 마리아의 얼굴과 형태에서 추구되었듯이, 천사도 같은 방식으로 젊은 화음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티첼리는 원형 테두리를 차지하는 계산된 화보 주문으로 이 까다로운 형식을 익혔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메디치의 귈리아노>다.  1478년.  로렌조 일 마그니피코의 남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478년 피렌체 대성당에서 메디치와 경쟁하는 파치 가족을 음모로 25세의 나이로 암살 당했다.  베르가모(아카데미아 카라라)와 워싱턴(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초상화의 추가 버전이 보존된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젊은 여자의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