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페르디난드 볼과 제라드 테 보흐

boriburuuu 2020. 10. 25. 16:26

1650년 페르디난트 볼의 < 마리아 레이의 초상화>이다.
마리아 레이와 뮬레나어는 1649년에 결혼했다. 이것이 그들의 두 초상화를 모두 그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와 로엘로프의 검은 옷은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실크로 만들어져 매우 비쌌다 ,또한 마리아의 진주, 반지, 팔찌도 비싸다. 오른손에 든 부채는 똑같이 배타적이어서 진정한 지위의 상징이다. 페르디난드 볼의 <마리아 레이의 초상>이다.

<자화상> 페르디난트 볼, 1653
이것은 페르디난트 볼이 자신을 화가로 표현한 유일한 자화상이다. ‘고풍’ 의상에 베레모를 걸치고 팔레트와 붓을 든 그는 자신감에 찬 분위기를 풍긴다. 볼이 이 시간까지 10년 이상 독립적인 주인으로 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스승인 렘브란트의 분명한영향은 빛에서 분별할 수 있고 그의 옷의 노란 금을 능숙하게 칠할 수 있다.

<자화상> 페르디난트 볼, c. 1669.
프레임의 모델과 윤곽은 이랑 스크롤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것들은 자연으로부터 현실적인 모티브 뒤에 크게 숨겨져 있다. 볼은 아마도 1669년에 일어난 두 번째 결혼을 계기로 이 초상화를 그렸을 것이다. 커다란 해바라기는 사랑을 상징하며, 그 틀은 전체적으로 성숙함에 있어서 러블리한 자연을 나타낸다.

 

페르니난드 볼의 <엘리자베스 델의 초상>이다. 1653년

<암스테르담 익명의 세 레전트들의 초상화>, 페르디난트 볼,c. 1668 - c. 1671
레퍼스의 망명은 원래 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데려갔다. 그 전염병은 17세기에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고통을 가진 사람들도 그곳에서 보살핌을 받았다. 세 명의 섭정이 하인을 감독하는 것에서부터 물건을 사는 것에 이르기까지 기관의 일상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볼은 그들을 평범한 뒷벽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혔다. 그들의 신원은 그림이 걸려 있는 굴뚝 조각의 가족 팔에서 알려져 있다.

<헬레나 반 데르 샬케>. 제라드 테 보흐(II), 약 1648년
3 세의 나이에, 작은 상인 딸 헬렌은 테 보흐가 그녀를 묘사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녀는 작은 성인처럼 고급 드레스와 갈대 가방을 보고 있다. 캔트, 끈, 그리고 커다란 금 사슬이 그녀의 의상을 장식한다. 그녀의 등에는 슬레이트 조각이 여전히 보인다. 어머니가 아이를 붙잡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훈계’로 알려진 갤런트 대화> 제라드 테르 보흐(II), c. 1654
심리적 민감성으로, 여기 테르 보흐는 침실에서 세 명의 인물을 묘사했다. 여전히 허리띠에 칼을 꽂고 무릎에 모자를 얹은 젊은이가 젊은 여자를 부른다. 그는 웅장한 새틴 가운을 입은 소녀를 열심히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말하는 몸짓을 한다. 그가 음란한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일까? 등을 돌린 채 그녀의 반응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모세 테르 보쉬의 추모 초상> 이다. 제라드 테르 보쉬(II), 게시나 테르 보쉬 1667 - 1669년 기념 초상화
두 화가는 1645년에 태어난 막내 동생 모세를 기념하기 위해 이 초상화를 제작했다. 모세는 1667년 영국의 펠릭스스토우 인근 랑가드 요새가 난입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는 1664년부터 영국을 상대로 네덜란드 해군에서 복무했다. 그림에서 모세는 그의 군대 생활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둘러싸여 있다 : 시간 (주머니 시계), 죽음 (해골), 영원 (바위 위의 담쟁이덩굴) 및 충성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