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미술관/브레라 미술관

브레라미술관 4

boriburuuu 2020. 11. 1. 15:05

루도비코 마졸리노 <나자로의 소생>이다.1527년. 색다른 상상력으로 찬사를받은 화가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다. 여기서 나사로는 더 관례적인 동굴이 아닌 저수지에서 나온다. 오른쪽에있는 사도의 심각한 측면과 왼쪽에있는 그룹의 거의 저속한 제스처의 균형을 맞추는 기교가 있다. 한 인물은 코를 잡고 다른 인물은 안경은 거의 충격적이다. 팔레트는 부드럽고 뉘앙스가 있으며 디테일에 대한 관심은 내러티브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도소 도시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다. 1526년  성자의 눈부신 누드, 화환처럼 그의 주위를 둘러싼 녹색 망토는 감귤 나무에 묶여있어 순교로 이어질만큼 강한 신의 사랑을 상징한다.  Dosso는 1520 년대 중반에 Raphael의 스타일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실험적인 pittura di tocco는 작은 점 동작과 활기찬 붓놀림을 기반으로 한 스타일로 그림에 부드러움을 더하고, 녹색과 갈색의 잎사귀와 땅을 그렸다. 

산치오 라파엘로의 마리아의 결혼이다.  카스텔로 시 성 프란체스코 성당 제단 장식화로 라파엘로가 스무살 무렵에 그린 초기 작품이다. 라파엘로는 스승이나 당대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응용해 그림을 그린 경우가 많았는데 이 그림도 그 중 하나란다. 중앙에 사제가 서 있고 왼쪽의 여자가 마리아, 오른쪽의 남자는 요셉이다.

 

전설에 따르면 마른 나무에 꽃이 핀 사람이 마리아의 남편이 된다고 했는데 요셉의 나무만 꽃이 피어 있고 아래 남자는 홧김에 부러뜨리고 있고 그 뒤는 낙방한 사람들이다. 배경의 성당은 브라만테가 1502년 완공한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몬테이오' 성당의 작은 성전이다. 건물 가운데 라파엘로의 사인이 있는데 이는 화가의 위상을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다.   Caravaggio는 1605 년과 1606 년 사이에 Emmaus에서의 만찬을 그렸다. 이 그림은  출처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다른 초기 버전을 식별 한 반사 및 X-ray 검사로도 확인되어 복사본이 아님을 증명한다. 카펫이 드리워진 테이블의 묘사는 카라바조의 전형적인 장치로, 작가가 런던의 국립 미술관에 있는 그림에서 이전에 다루었던 이 주제의 첫 번째 버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전 버전과 비교하여 이 그림은 극적인, 거의 연극적인 빛의 처리와 결합 된 더 큰 친밀감과 더 평범한 장면을 보여 주며, 그 순간의 신성한 본성을 강조한다.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가> 프란체스코 살비 아티 . 1539 ~ 41.  살비알티는 1539 년부터 1541 년까지 베니스에있는 동안 Corpus Domini에 헌정 된 Observance의 도미니카 수녀의 귀족 수녀원을 위해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주요 인물을 직접 그렸을 수 있으며, 배경에있는 인물은 그의 조수 Giuseppe Porta에게 맡겼습니다. Salviati는 미켈란젤로에 걸 맞는 힘을 보여주는 인물과 매너리스트 팔레트를 결합하면서도 브론 지노를 연상시키는 우아함과 베니스에서 얻은 새로운 색감으로 조화를 이룬다.

안니발레 카라치가 그린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1563-94> 이다. 야곱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준 땅에 있는 야곱의 샘인데 야곱의 자식들이 물려 받은 후 이스라엘인들과 사마리아인들간에 깊은 정치적, 종교적 분쟁이 있었다. 그림 속의 제자들은 음식을 가지고 시카르로 되돌아오고 있고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는 항아리가 놓여져 있는데 육체와 영혼의 목마름이라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예수는 두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가슴에 댄 것은 메시아임을 드러내고 왼손은 시카르 시내를 가리키고 있는데 여인에게 이웃들에게 새소식을 전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귀도 레니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1605>다.  여기서 레니는 갈라디아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바닥에 앉은 베드로를 꾸짖으며 눈물을 흘리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참회 주제는 개신교가 거부 한 성사를 고집하는 반개혁의 그림에 완벽했다. 1601년에 로마로 이주했지만 볼로냐로 자주 돌아온 Reni는 Sampieri 가족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컬렉션은 1811 년까지 남아있었다. 레니는 키라치의 고전주의와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사이를 오간다.

조반니 프란체스코 구에르치노의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이다. 왼쪽의 등을 돌린 사라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늙은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집을 떠나라고 명하면서 그들을 향해 복을 내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갈은 앞날을 생각하며 비참해하는 모습이고 이스마엘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이스마엘은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의 저녁식사다. 빛과 어둠을 이용해 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마티아 프레티의 <공물 돈을 지불하는 성 베드로>다. 1635 년. 이야기는 가버나움을 배경으로 한다. 세금 징수원들은 성전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이 지불한 공물 돈을 베드로에게 요청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호수에서 낚시를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곳에서 물고기의 입에서 공물을 바칠 동전을 찾으신 것이다. 로마에있는 동안 프레티는 바르돌로메오나 카라바조의 작업을 응용해 작품을 그렸다.  

다니엘 크레스피의 <최후의 만찬>이다. 1629년.  그림은 1805 년에 폐지 된 Brianza에있는 브루고라의 베네딕트교회를 위해 그려졌다.  예술가는 밀라노의 La Passione 교회를 위해 페라리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확실히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크레스피의 그림은 사도들의 머리 그룹화와 인물들이 보여주는 활력에 관해서도 레오나르도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에서 실행 한 버전을 그린다.

프란체스코 카이로의 <시에나의 성 캐더린>이다. 1650년. 이 그림은 프란체스코 카이로의 사적인 헌신을 목적으로 한 작품의 예외적인 예이며 황토색, 밝은 노란색 및 청회색 색조가 지배적이다. 사보이 가문의 법정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특징 지어진 카이로의 고난의 삶의 메아리는 그의 인물들의 비극적인 우울 속에서 발견 될 수 있다.

<두 천사가 있는 성 세실리아>다. 줄리오 체사레 프로 카치니.  1620 ~ 5년. 한쌍의 그림인 성 제롬과 함께 파비야의 제수교회에서 가져온 것일 수 있다. 직사각형 형식은 두 그림이 한때 예배당 (또는 벽 기둥)의 측면 벽에 걸려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실리아의 모습은이 방에 전시 된“세 명의 예술가의 그림”에서 루피 나와 매우 흡사하다.

<천사와 함께 있는 성 제롬>이다.  줄리오 체사레 프로 카치니.  1620 ~ 5년. 

<파도바의 성 안토니가 숭배하는 성가족>루카 지오다노 . 1664-5년.  이 그림은 루카 지오다노가 1664-5 년에 나폴리에서 떠나 피렌체에서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베니스까지 여행했을 때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마티아 프레 티, 루벤스,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에게서 배운 회화와 그림에 대한 바로크 탐색으로 이미 마스터 리베라의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주제는 또한 나폴리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성가족에 대한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1631년 플랑드르 바로크 회화의 대가인 루벤스가 말리네스 성당을 위해 만든 거대한 제단화 <최후의 만찬>이다. 루벤스 특유의 여유롭고 풍부한 감정 표현과 인물들의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 만찬을 끌어가는 예수와 맞은편에 앉아 그를 외면하는 유다의 표정이 대비된다. 왠지 유다는 불안하고 초조하게 무언가 살피는 모습이다. 루벤스 후반 제작의 다른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수행했다. 따뜻하고 강렬한 스타일로 칠해져 있으며, 장엄한 고전적 균형을 이루는 프레임에 굵은 선이 형성된다. 16세기 이탈리아 그림, 특히 베네토 그림의 영향은 분명하다

 

안토니 반 다이크의 <여인의 초상>이다. 1635년. 루벤스가 그린  마리아 데 메디치의 초상화와 같은 학술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1622 년과 현재 Prado에서 Van Dick은 애도하는 브뤼셀에서 온 크로이 가족의 여성을 묘사 한 최고 품질의 그림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팔찌, 목걸이, 진주 귀걸이 및 목에 값 비싼 십자가를 착용하여 우울한 옷차림을 밝게하는 그림에서 어둠을 완화하기 위해 크고 화려한 매달등을 활용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의 <파도바의 성인 안토니오와 함께 있는 성모자>이다.  1630년. 이 그림은 15 세기와 16 세기 롬바르드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을 대가로 또 다른 플랑드르 그림 4 점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서 브레라에 왔다. 마돈나는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 르네상스 예술, 버진의 포즈와 특징이 티치아노의 작품을 분명히 반영하기 때문에 베로나에있는 반 다이크의 두 번째 거주 기간 동안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착한 사마리아인> 요아킴 폰 산드라르트. 1632 년.  하단 중앙에 서명하고 날짜를 기입한 이 그림은 미술사에 대한 공헌이 중요했지만 그 자신의 권리로 조각가이자 화가이기도 한 독일인  요아킴 폰 산드라르트의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그는 고전 조각상 (오른쪽의 누드)의 다양한 자극을 결합하고 배경의 풍경은 로레인에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미묘한 분위기는 티치아노의 작업을 반영한다.

<이삭의 희생>이다. 제이콥 요르단스. 1625년.  1734년 헤이그의 화가 상속자에게서 구입한 이 그림은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으로 옮겨져 프랑스인이 루벤스로 요청하여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그것은 교환의 일환으로 Brera에 왔으며 여기에서 Jordaens의 작품으로 올바르게 식별되었다. 연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의 다른 작품에 사용 된 것과 유사한 냉정한 블루스와 브라운을 사용한 것은 1625 년이나 1626 년에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고전적인 장면의 꽃병>이다. 마니포추라 디 볼테라. 1825 년  이 기념비적 인 꽃병은 한때 밀라노의 Palazzo Reale을 장식했다. 각각의 중앙 밴드는 고전 신화의 한 장면을 전달한다. 이 꽃병에서 우리는 폴리제나의 희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센터의 어린 소녀는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 톨레무스에 의해 살해 당했고, 폴리제나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인해 사망 한 아버지의 복수를했다. 왼쪽에는 신부와 청년이 희생을 축하하고 오른쪽에는 여종이 폴리제나의 어머니 헤큐바를 위로한다.  오른쪽의 꽃병은 장식용 모티프, 잔잔한 잎 및 덩굴손이 장미 화환, 덩굴 싹 및 포도 다발과 번갈아 가며 풍부하게 강조되었고 신화적인 장면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이 꽃병은 1824 년 청중 회관을 위해 로레인 가문의 페르디난도 3 세 대공이 구입 한 순수주의 조각가 로렌조 바르톨리니가 현재 피렌체의 피티 궁전에 있는 것과 비슷한 쌍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