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미술관/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3(프란체스코 하예즈)

boriburuuu 2020. 5. 31. 18:26

프란체스코 하예즈의<키스>이다. 19세기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이 작품을 그린 하예즈는 30년간 브레라 학교의 교사이자 원장이었다. 어두운 계단에서 키스를 하는 이 커플은 정치적 은유를 상징하고 있는데 남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투에 나가면서 연인에게 키스를 하고 있는데 남자는 이탈리아 국기인 붉은 색을 여자는 프랑스 국기인 푸른색을 상징하고 있고 두 나라의 불안한 동맹 관계를 키스로 표현하고 있다.

 

 

 

가까이 당겨서 보니 여자는 눈을 뜨고 있고 실제로 키스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전쟁에 나가는 피에토 로시를 만류하는 부인과 두딸>이다. 1818-20년. 1820 년 브레라에서 파르마의 영주 피에트로 로시 (Pietro Rossi)라는 칭호로 모습을 드러냈고, 베로나의 영주인 스칼리거 (Scaligers)가 자신의 영지를 훼손하고 Pontremoli의 성을 지키고 베네치아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의 적들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이 그에게 명령을 거부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이 그림은 현대 역사 주제의 참신함을 소개하는 낭만주의 그림의 선언으로 환영 받았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보리 스탐파 가족의 초상>이다. 1822년.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은 스테파노 데시오 스 탬파 백작의 미망인 테레사 보리 스 탬파 (Teresa Borri Stampa)와 어머니 마리아나, 오빠 주세페, 아들 스테파노와 함께 있다. 야외 무대는 백작 부인의 세련된 프랑스 문화에 대한 찬사이지만 그녀는 사진이 튀어 나온 배를 보여 준다고 불평하면서 그림을 싫어했고 기둥에 남편의 프로필이 있는 항아리를 거부했다. 그림은 그가 꽃병을 덮고 풍경을 확장할 때까지 30 년 동안 작가의 스튜디오에 남아있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그녀의 목욕탕의 밧세바>이다. 1841년. 렘브란트와 같은 옛 거장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 주제는 귀도 레니, 카냐치, 도메니치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자연주의적인 터치로 여성 누드를 다룬 Hayez에 의해 성공적으로 해석되었다. 주제는 구약의 이야기지만 에로틱 한 영향이 강한 그림의 구실로 사용된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멜랑꼴리:우울>이다. 1840 년과 1842 년 사이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회화 전통에 대한 박식 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플랑드르 정물 인용까지. 예술의 후원자이자 주세페 마 찌니의 추종자 인 필리포 알라 폰 조니 후작을 위해 그린 이 그림은 뛰어난 작품성과 상징적인 가치로 인해 인기를 얻었으며 낭만주의의 불안 함을 상징한다. Hayez는 인물의 기분에 더 중점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시들어지는 꽃은 또한 우리에게 인간사에 대한 평온을 상기시킨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두사람의 포스카리>다. 1844년. 이 그림은 Byron의 드라마 The Two Foscari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다. 허위 혐의에 속은 총독은 음모가 밝혀지기 전에 죽은 아들을 추방한다. 적 진영이 해임을 선언하는 동안 뉴스를 듣고 슬픔에 잠긴 총독은 생명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Hayez는 다른 비극적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총독으로  묘사한다. 그림의 강렬함은 같은 이름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에 영감을 주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인데 이 작품 앞에서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림 속 여인도 아름다웠지만 옷자락의 표현 등이 정말 놀라웠던 작품이다. <셀린 타치오리 루가의 초상>이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테레사 만조니 스탐파 보리의 초상>이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57세의 자화상>이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알렉산드로 만조니의 초상>이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오달리스크.1937년.>이다. 19 세기의 오달리스크는 하렘으로 분리되어 접근 할 수 없었으며 에로틱 한 공상의 대상이었고 유럽에서 인기있는 주제였다. 동양과 그 문화는 당시 희귀한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로 알려졌다. 그의 주제를 다루면서 하예즈는 라파엘과 티치아노의 예를 통해 학문적 누드와 삶에서 공부 한 누드를 결합했으며 동양 의상으로는 16세기 베네치아 판화를 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