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미술관/브레라 미술관

브레라 미술관 5

boriburuuu 2020. 11. 1. 18:30

앵그르의 작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인데 역시 피부나 옷의 질감등이 뛰어나다. <캐롤린 마일의 초상>이다.

 

제롤라모 인두노의 <슬픈 예감>이란 작품이다, 1862년.  뒷벽에 하예즈의 키스가 보이고 그 옆에 가리발디의 흉상이 놓여져 있다.  소녀가 민병대에 들어간 애인을 그리워하는 장면인데 남자는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으로 전쟁에 나간 것이다. 제롤라모는 이탈리아 혁명 운동을 한 혁명가였다고 한다.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큰 희생> 1860년. 제롤라모 인두노의 또 다른 그림인데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에게 슬픈 키스를 보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림의 구성은 분명히 하예즈의 키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아들이 싸우기 위해 출발 할 때 그녀의 아들에게 작별 키스를하는 어머니와 같은 더 현실적인 주제에 끌린다. 가리발디. 예술가와 그의 형제 도메니코는 인두노의 개인적인 경험 인 가리발디의 추종자이기도하여 치열한 전투를 묘사하는 동시에 애국심과 가족 유대를 축하하는 더 행복한 장면을 그렸다.

주세페 몰테니의 <아이를 잃은 여인의 슬픔>이란 작품인데 표정이 압권이다. 1845년. 브레라에서 상영 된이 작품은 몰테니의 걸작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1855 년 파리의 Exposition Universelle에서 상영되었다. 의심 할 여지없이 하예즈의 우울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은 일상적인 맥락에서 도덕적, 사회적 의미와 함께 현대적인 조명으로 주제를 재검토한다. 그녀가 꽃의 화환을 짠 아들을 애도한다. 몰테니는 1855년 브레라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임명되었고 그 후 감독이되었다.

 

주세페 몰테니의 < "니나 또는 사랑에 미친 소녀"의 무대 의상을 입은 가수 Giuditta 파스타의 초상화> 이다. 1829년. 유명한 소프라노는 파이 시엘로의 심각한 드라마의 주인공인 니나의 모습으로 여기에 그려졌다. 복원가이자 오래된 거장의 감정가로서 이미 잘 알려진 몰테니는 하예즈와 경쟁했다. 그는 우아한 가구로 그림을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귀중한 보석과 의복을 재현할 수 있었으며 시터의 모습을 꾸미는 데 아무런 억압도 보이지 않았다.

<펠리스 벨로티, 가에타노 카타네오, 카를로 포르타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다. 주세페 보시.1809년. 화가는 문화적 관심사와 아이디어를 공유 한 친구들과 함께 자신을 묘사했다. Bossi는 맨 왼쪽에 있고 Brera의 큐레이터인 Gaetano Cattaneo는 중앙에 그림자가 져 있다. 그리스 학자 펠리체 벨로티가 왼쪽 전경에 있고 시인 카를로 포르타가 오른쪽에 있습니다. 칙칙한 갈색과 질감이있는 흰색을 기반으로 한 억제 된 팔레트는 젊은 지식인의 자랑스럽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시선을 강조한다.

도나토 브라만테의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이다. 눈빛이 참 처연하다. 1490-9년. 브라만테는 수학적 연구의 중심인 우르비노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여기서 원근법의 사용이 통제 된 공간의 통제 된 조직의 한 형태로 개발되었다. 밀라노로 이사하면서 그는 관찰자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시각 효과와 환상 효과를 추구하면서이 연구를 더욱 진행했다. 기둥의 그리스도는이 혁신적인 언어의 선언으로 간주 될 수 있으며, 롬바르드 예술 문화는 전례없는 해결책을 채택 할 수있었다. 교회 벽의 공간 확장 : 트롬 프뢰유를 통해 생성 된 공간에 대한 동일한 아이디어가 브레라에서 그림의 주요 주제를 구성한다. 여기서 여러 구성 장치-전경, 창, 기둥을 차지하는 조각 몸체 그림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확장 – 그리스도 께서 고통을 받고있는 큰 방의 존재를 암시한다.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의 작품과의 만남에 자극을 받아 몸의 움직임과 얼굴 표현의 의사 소통 잠재력을 조사했다. 그러므로 기둥의 그리스도에서 구속에 의한 육체의 수축과 투명한 눈물과 같은 자연주의의 세부 사항이 풍부하며 관찰자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은 브라만테의 훈련에서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1490년대 초에 실행되었을 것이다.

브론치노가 그린 <안드리아 도레아의 넵튠 초상화>다. Paolo Giovio는 브론지노에게 이 초상화를 코모 근처의 보르고 비코에 모아 놓은 박물관을 위해 저명한 남자들의 “진실한 상상”을 수용하도록 의뢰했다. 여기에서 교황 클레멘트 7 세와 찰스 5 세 황제 밑에서 복무 한 제독 인 안드레아 도리아는 우화적으로 바다의 신 넵튠으로 변신한다. 그는 배의 돛에 가려진 성기가 벌거 벗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원래 오른손에 노를 들고 있었지만 나중에 바다 신의 삼지창을 나타내도록 변경되었다.

움베르토 보초니의 <자화상>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한 점 보인다. <젊은 여인의 얼굴>이다.

<Palazzo Grimani 및 Palazzo Manin이있는 리알토 방향 대운하 전망> 프란체스코 과르디.  1756 ~ 60년.  아버지 도메니코의 워크샵에서 훈련을 받고 카날레토의 영향을 받은 후 과르디는 자신의 원근법을 익히면서 자신 만의 멋진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날레토의 고요하고 객관적인 전망에 자신의 모습이 진동하고 건물이 낡아 보이는 빛의 변화를 통해 전달되는 긴장된 불안감에 빠져 황혼의 해에도 여전히 화려한 도시의 매력을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