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관/프라도미술관

티치아노 초상화 위주

boriburuuu 2020. 11. 19. 15:24

티치아노의 <자화상>이다. 1562년.   평생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럽 실세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신화, 종교, 역사화 등 그 모든 것에서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유럽 최고의 화가로 군림한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닿는 빛이 그 본래의 색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해낼 줄 아는 그야말로 뛰어난 색 감각의 소유자였는데 많은 색을 다채롭게 사용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그림에서처럼 단출한 색 몇 가지만을 가지고도 완벽한 데생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미묘한 지점들을 포착해내는 데 있다. 그는 “훌륭한 화가에게는 오직 세 가지 색, 검은색, 흰색, 빨간색만 필요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자화상에서도 역시 꼼꼼하고 성실한 세부 묘사를 많이 벗어난 그의 감각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붓이 닿은 흔적이 과감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적당히 떨어져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형태감이 느껴진다. 뭉개진 물감층이 만들어낸 그의 수염은 손을 대면 그 부드러운 촉감이 그대로 전해질 듯하다. 카를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하사받은 두 줄 목걸이는 툭툭 찍어낸 붓질만으로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목걸이의 찬란한 빛은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미묘하게 그 음영을 드러내고 있어 사진보다 더한 극도의 사실감을 선사한다.

티치아노의 〈카를 5세의 기마상〉이다. 1548년. 이 작품은 뮐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무찌른 황제의 위용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을 빼고 봐도 완벽한 황혼녘의 풍경화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거친 말(자연)을 제압하는 영웅상으로, 훗날 궁정화가들이 그리는 많은 ‘황제 기마상’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티치아노의 기마상은 로마제국 시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티치아노의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 황제>다. 1533년.

티치아노의 <알폰소 다발로스의 연설>이다. 1540-41년.  1538년 밀라노의 총독이었던 카를 5세는 알폰소 다발로스를 페스카라와 바스토의 후작으로 임명하였다.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후작 옆에 대를 잇게 될 아들 페란테가 서 있다. 아마도 그림의 장소는 슐레이만 2세와 접전중이던 헝가리 어느 마을일 것이다. 고전의 영향을 받아 화면 전체를 떠다니는 붉은 빛이 망또를 더 붉게 만들고 하늘의 구름도 일출로 인해 붉은 빛을 보인다. 창들로 보아 수많은 군인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근법 없이 붓터치와 스푸마토 기법으로 원거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압권은 금속으로 빛나는 무기와 갑옷인데 도금으로 장식된 갑옷에 반사된 영롱한 빛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물체의 재질을 알게 해 준다.

티치아노의 <필리페 2세의 초상>이다. 1551년.

티치아노의 <포르투칼의 이사벨라 여왕>이다. 1548년. 티티안이 포르투갈의 마누엘 왕의 딸이자 1526년부터 찰스 5세의 아내인 이사벨라를 그린 초상화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가장 감동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황후가 죽었을 때, 찰스는 그녀의 초상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죽은 아내가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에게 보낸 초상화를 되찾으려 여동생 메리로부터 이 초상화를 받았지만, 아내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찰스는 그녀의 외모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한 것을 시각화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코의 에피소드를 설명해 줄 것이다. 찰스는 티티안에게 코를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것은 티티안이 실제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다. 일생 동안 만들어진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그녀에게 아퀼린 코로 보여 주는데, 이 코는 현대의 해설자들에 의해 언급된 특징이며, 티티안이 그린 거의 직선적이고 고전적으로 완벽한 코로는 볼 수 없다. 이 보정으로 티티안은 이사벨라의 코와 찰스의 튀어나온 턱을 초상화에서 미용 수술을 반복했다

<페데리코 곤차가 1세>다. 1529년.

티치아노의 <다니엘레 바르바로의 초상>이다. 1545년. 다니엘레 바르바로는 고귀한 베네치아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베로나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교육을 받았고 파두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신아리스토텔리아 성향의 철학자였던 그는 중요한 베네치아 인문학자들과 친구가 되었고 1545년 파두아에 식물원 건설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는데, 1548년에서 1550년 사이에 영국 에드워드 6세 법원 대사로 임명되면서 정점을 찍은 베니스 공화국의 봉사에서 번성하는 경력의 시작이었다. 1551년 베니스로 돌아오자 그는 아킬레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이 초상화는 그가 밖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본주의자였을 때 그려졌으며 놀라운 단순하다. 그것은 그를 학자로서 보여주므로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물체는 책인데, 그 정체는 불분명하다. 초상화의 날짜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논평의 성공을 감안할 때, 이것이 바르바로가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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