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관/프라도미술관

보티첼리와 한스 발둥

boriburuuu 2020. 11. 19. 19:22

산드로 보티첼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득 받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종교적인 이유로 한때 붓을 꺾기도 했지만 그는 중세 동안 금지되다시피 한 고대 그리스 신화를 그림으로 옮김으로써 고대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회화의 진수를 펼쳐보인다.

아래는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1>이다. 1483년.   이 작품들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일화를 담고 있다. 라벤나의 오네스티 가문 상속자 나스타조는 지체 높은 신분의 여인 파울라를 지극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그를 거절했고, 이에 나스타조는 상사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로 하여금 잠시 라벤나를 떠나 있기를 권했다. 첫 그림 왼쪽 모퉁이에는 라벤나를 떠난 나스타조가 머물던 천막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 옷을 입은 나스타조는 망연자실한 채 숲을 산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나뭇가지를 집어 개를 쫓는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그날 나스타조는 산책을 하다 우연히 칼을 든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알몸의 여자를 쫓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여인이 기사가 풀어놓은 사냥개에게 잡혀 쓰러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 그 개를 물리치려고 한다.  인물과 사건을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려서 마치 오늘날의 사진과도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라면, 이 그림은 그런 자연주의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동일한 인물이 한 화면에 두 번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숲에 가득한 나무들 역시 요즘 동화책에서 흔히 보듯 도식적이어서 사실성보다는 그림으로서의 장식적 기능에 더 충실한 것 같다.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2>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3>이다.  나스타조는 그 기사로부터 슬픈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기사는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여인이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얼마지 않아 여인도 죽게 되는데 기독교에서 금하는 자살을 한 기사와 그를 죽게 만든 여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을 받게 된다. 금요일마다 남자는 여자를 쫓아 칼로 찔러 죽인 뒤 그녀의 내장을 꺼내 개에게 던져주는 일을 반복하고, 그녀는 늘 그런 죽임을 당하면서도 다시 살아나 매번 다시 쫓기고 죽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나스타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쫓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그 장소에서 성대한 파티를 연 다음 자신이 흠모하는 파울라를 초대하여 그 장면을 목격하게 하였다. 파울라는 비로소 마음을 열고 그의 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스 발둥의 <세 시기>다. 1541-44년.    이 작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그래서 오히려 더 관능미가 풍기는 누드를 주로 그렸다.  〈인간의 세 시기〉는 그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는 아기 시절을 거쳐 성숙한 여인의 시기가 지나면 노년이 된다. 이 세 시기를 거친 자들은 모두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에 이끌려간다. 해골은 당시 ‘허무’를 뜻하는 바니타스양식에 자주 등장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시간의 유한함 앞에 허무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노년의 여인은 죽음을 앞두고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처녀 시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오른쪽 화면 상단에 십자가가 보인다. 화면 아래 왼쪽의 올빼미는 애도나 죽음을 의미한다.

한스 발둥의 〈삼미신〉이다. 1541년-44년.  삼미신은 제우스와 에우리노메 사이에 태어난 딸들로 음악에 능통했다. 류트나 비올라가 그려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두 여인은 책을 들고 있는데, 이들이 음악만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능력, 즉 지적 능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하단의 아이는 악보를 펼쳐놓고 백조와 함께 노는데, 고대인들은 새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 발둥이 그린 이 〈삼미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 속 여신들처럼 우람하고 조각적인 몸이 아니다. 그저 매끈하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져 무게감보다는 경쾌함이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