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테르 브뤼헬의 <죽음의 승리>다. 1562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림 속에 가득한 해골들은 도처에 가득한 죽음 그 자체이다. 그들은 어떤 것도 예견하지 못한 채 생의 환희에 젖어 살던 인간들을 낫으로 무참히 공격한다. 오른쪽의 해골들은 십자가가 새겨진 관을 방패 삼아 도열해 있다. 우왕좌왕하는 인간들은 그 방패 같은 관들 사이에 있는, 역시나 가장 큰 관의 뚜껑 같은 출입문 아래로 몰려들지만, 막상 그 문 뒤에는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면 오른쪽 먹다 만 음식이 놓여 있는 하얀 탁자 아래로 카드들이 떨어져 있다. 카드놀이를 하며 질펀하게 먹고 마시던 이들은 혼비백산 도망치지만, 결국 해골들을 피할 수는 없다. 한 기사가 칼을 들고 죽음에 맞서지만 그 결과도 불을 보듯 뻔하다. 오른쪽 모퉁이에는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아직 깨닫지 못한 청춘 남녀가 술과 사랑에 취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화면 왼쪽에 등장하는 하얀 말 위에는 해골이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모래시계는 생명의 무상함, 그리하여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의미인 ‘바니타스’를 상징한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왕관을 쓴 왕이 보이지만, 그 역시 죽음 앞에서는 맥을 쓸 수 없다. 그 아래로 힘없이 당하는 추기경 등 권력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브뤼헐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 누구 편에 섰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비단 죽음이라는 영원한 승자를 잊지 말라는 의미와 더불어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인간 사이에 자행되는 폭력의 잔인함을 히에르니무스 보쉬의 전통을 살려 그려내고 있다.
안토니스 모르의 <메리 튜더 여왕의 초상>이다. 1554년. 화가는 영국 체류 시절 메리 튜더 여왕의 초상을 비롯해 왕실 초상화를 다수 그렸다. 죽어서도 영원히 남게 되는 ‘흔적’으로서의 기념품, 경우에 따라선 얼굴 한 번 못 보고 혼사를 진행하는 정략결혼을 위해 보내지곤 하던 왕실 초상화 들은 사진이 없던 시절, 사진만큼이나 정확하되 오늘날의 사진 보정술만큼의 교묘한 ‘성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화가가 아무리 열심히 그렸어도 주인공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치껏’이 요구되는 왕실 초상화 작업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 할지라도 손을 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와 그의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낳은 딸로 영국 여왕이자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왕비이기도 했다. 메리 튜더와 펠리페 2세는 꽤 가까운 혈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결혼은 근친혼이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이권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른여덟까지 독신을 고수하던 메리가 굳이 스물일곱의 연하남 펠리페 2세와 결혼한 것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수준의 외교적 정략에 의한 것이었다. <메리 튜더의 초상화>는 그녀가 펠리페와 결혼하던 해에 그려졌다. 그림 속 메리 튜더는 튜더 왕가를 상징하는 장미를 가슴에 안은 채,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이다. 1600년경. 카라바조는 균형 잡힌 ‘조각 같은’ 인체 묘사라는 르네상스적 이상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명암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인물의 입체감, 즉 양감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한층 세련된 사실주의를 전개, 바로크 회화를 이끌어나갔다. 루터파 등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해 반종교개혁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가톨릭 교회는 미술 작품을 통해 신도들에게 좀 더 강한 심리적 자극을 주고자 했다. 카라바조가 구사하는 명암법은 마치 연극무대에서 인공적인 조명을 받고 서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효과’를 자아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종교화의 주 등장인물인 성인들을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소시민들의 옷차림으로 바꾸거나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등 진정한 의미의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술주정뱅이에다 살인사건까지 저지른 그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섬을 떠돌며 숨어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그림을 높이 평가한 로마 지도층 인사들이 그간의 죄를 사면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듣고 홀로 길을 떠났다가 도적을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채 헤매다 병까지 걸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객사한다. 그림에서 성서의 영웅인 어린 다윗은 골리앗의 목에 밧줄을 감고 있다. 주름 가득한 골리앗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화면 밖 어딘가를 응시한다. 이마에는 다윗의 돌에 맞아 생긴 상처가 선명하다. 화면 상단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빛은 연극 무대의 조명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만 밝게 비추는 빛은 신체의 양감을 도드라지게 할 뿐 아니라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 속 처참함을 더욱 절절하게 체험하게 한다. 움켜잡은 손, 잘린 목 등은 불편할 정도로 잔인한 인상을 준다. 심리적 자극을 목표로 했던 바로크 시대 화가들은 자주 이런 끔찍한 장면을 그리곤 했다. 이 작품 속의 목 잘린 골리앗은 화가 자신의 모습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코레조의 <놀리 미 탕제: 나를 만지지 말라>다. 1522년-25년. 바사리는 이 작품을 코레조의 가장 뛰어난 초기 작품으로 꼽았다.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해서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놀라고 있다. 코레조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여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인물의 긴장된 모습, 뒤로 펼쳐지는 숲 속 장면, 흔들리는듯한 회면의 울림, 대각선 구도 등 거장의 숨결이 느껴진다. 동틀 무렵의 희미한 빛이 마리아의 벨벳 의상과 흘러내리는 머리결에 반사되고 있다. 노랑, 파랑, 초록 톤의 색상과 대기를 감싸며 떠오르는 태양의 따뜻한 빛이 긴장된 두 인물의 시선이 오가는 공간을 물들이고 있다.
코레조의 <세례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다. 1515-15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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