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관/프라도미술관

엘 그레코

boriburuuu 2020. 11. 19. 21:16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다. 1577-79년. 구름과 빛이 가득한 신비롭고도 기이한 배경과 길쭉길쭉하게 늘어진 신체, 화려하면서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원색 등은 매너리즘 화가 엘 그레코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하나님은 죽은 예수의 몸을 받쳐 들고 있다. 그들 주위로 날개 달린 천사들이 마치 새 떼처럼 부산스럽게 모여들고 있다. 염려와 공포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들의 표정은 감상자의 ‘공감’을 자극적으로 유도한다. 축 처진 상태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예수의 몸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킨다. 노랑, 빨강, 파랑 그리고 초록 등의 생생한 색이 화면 곳곳을 채우는 동안 예수의 피부만큼은 말할 수 없이 창백해 보여 시선을 압도한다. 가슴에서 허리 사이에 난 작은 상처는 십자가 처형 당시의 고통을 가능한 한 빨리 덜어주기 위해 롱기누스가 창으로 찔러 생긴 것이다.

엘 그레코의 <우화>다. 1580년.

엘 그레코의 <성 안나과 영아 세례 요한과 함께한 성가족>이다. 1600년.

엘 그레코의 <성 베로니카의 베일>이다. 1586-95년. 엘 그레코는 중세 말기에 매우 인기를 끌었던 우상화 모티브인 베로니카 베일에 성스러운 얼굴의 다양한 버전을 실행했다. 중세 시대에 전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갈보리로 가는 길에 한 여성이 예수에게 이마에서 땀과 피를 닦아내기 위해 하얀 천을 바쳤고, 그의 얼굴의 특징이 천에 각인되었다. 비록 이 이야기가 루크 8:43-48에서 예수의 옷을 만지고, 외경 복음서 중 하나에서 베로니카라고 불리는 여성과 원격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성서적 설명은 없다. 오히려 베로니카라는 이름과 베일의 전설 사이의 연관성은 단어 놀이와 더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은 천 자체의 의인화, 베라 우상 또는 그리스도의 특징에 대한 진정한 이미지일 수 있다.

엘 그리코의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다. 1580년. 왕실 입성은 실패했지만, 엘 그레코는 스페인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귀족들로부터 많은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이 그림은 ‘스페인 신사’의 한 유형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레도에 체류할 당시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세르반테스가 엘 그레코와 자주 교류했다는 주장으로 인해 그가 이 그림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혹자는 톨레도 시장이었던 후안 데 실바 이 리베라 3세를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슴에 손을 얹은 자세는 맹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아래로 왕에게서 받은 메달이 보인다.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검은 당시 수준 높은 검 제작으로 유명한 톨레도의 장인이 만든 최고급 제품으로 보인다.

엘 그레코의 <마리아의 승천>이다. 1592년.

엘 그레코의 <성 안드레와 성 프란치스코>다. 1592년. 성 안드레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사람이고 오른쪽 성 프란체스코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창시자다. 부유한 부모에게 많은 유산을 상속받아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던 그는 어느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두 손, 두 발, 그리고 가슴께까지의 다섯 상처(오상)를 직접 체험하는 환시를 겪었다고 한다. 그림 속 프란체스코에게 오상이 보인다.

엘 그레코의 <이집트로의 피신>이다. 1570년.

엘 그레코의 <파두아의 성 안토니>다. 1580년. 피라미드 구성과 이 형상의 기념비적인 성격은 프라도에서도 성 베네딕트(P-817)의 것과 유사하다. 오른손에 백합 스프레이를 들고 있는 리스본 출신의 이 성자의 예외적인 묘사. 그의 왼손에는 그리스도의 어린아이의 작은 이미지가 있는 책이 있는데, 나중에 이 그림을 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장 일반적인 우상화에 적응시키는 추가물이다. 성자 형상의 조각 양식, 엘 그레코의 서명, 그리고 기수 배경은 톨레도에서의 예술가의 첫 번째 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그리스 대문자로 책의 상단 가장자리에 서명되어 있다.

 

엘 그레코의 <구세주 그리스도>다. 1608-16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