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의 역량이 고스란히 담긴 이 다섯 작품은 현재 마드리드 마리나 에스파뇰라 광장에 있던 수도사를 위한 아우구스티노 교단 소속 부설 학교 예배당의 제단화로 제작된 일곱 점의 작품 중 일부다. 궁정화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엘 그레코는 1596년 이 제단화들뿐 아니라 내부 장식을 위한 조각품 제작도 의뢰받았다. 그는 이전까지 자신이 번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사례로 받고 3년여의 작업 끝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린 제단화 일곱 점은 나폴레옹의 침략 기간 동안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후 이 다섯 작품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지만, 여섯째 작품인 〈목자들의 경배〉는 루마니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곱째 그림은 소실된 상태이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성모의 대관식〉을 주제로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엘 그레코의 <목자들의 경배>다. 1612-14년. 이 제단화들에는 후기에 접어든, 그리하여 절정에 오른 엘 그레코의 특징적인 화풍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거친 붓질, 어딘가 모르게 불길하고 기이한 느낌이 감도는 원색의 채색법, 길쭉하게 늘어진 인물들의 왜곡된 형태, 원근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호한 공간 처리 등은 그림을 실제 현장, 실제 사건처럼 그리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연주의 화풍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그려진 이 제단화들은 대부분 천상의 상단부와 지상의 하단부로 구성되어 있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다. 1597-1600년. 노란 빛에 싸인 성령의 비둘기가 천상과 지상을 나누고 있다. 성령의 비둘기 바로 아래로 천사들의 머리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하다. 이 천사들의 형체는 구름과 이어지다 끊어지길 반복하며 감상자들을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심에 휩싸이게 한다. 오른편의 가브리엘 천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고 있고, 이에 마리아는 다소 놀란 모습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그가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떠나기 전에 완성한 초창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의 화풍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베네치아 체류 시절에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자연주의적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비록 천정 어디선가부터 들이치는 모호한 빛 처리는 꿈이나 환상 등의 신비감으로 가득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후기에 그려진 그림보다 인체 왜곡이 훨씬 덜해 비교적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바닥의 타일과 중앙 출입문 밖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에서 보이는 잘 계산된 원근법은 화면 속 공간을 현실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다. 1570-72년. 베네치아 체류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훨씬 더 자연주의적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엘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세례>다. 1597-1600년. 〈수태고지〉처럼 천상과 지상의 두 부분을 화면 전체 구성에 이용했다. 그림 상단에는 하나님이 갖가지 자세의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고, 하단에는 세례 요한이 세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례 요한은 조개에 물을 담아 예수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종교화에서 조개는 종종 예수의 ‘빈 무덤’을 상징하므로 앞으로 그가 죽은 뒤 다시 부활하게 됨을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강한 빛과 함께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다. 천사들이 예수의 머리께로 들고 있는 붉은색 천이 이 길쭉한 화면을 구획하고 있다.
엘 그레코의 <십자가 처형〉이다. 1597-1600년. 흔히 이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에 주로 등장하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인 마리아를 특별히 보살펴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 화면 오른쪽이 사도 요한, 왼쪽이 마리아이다. 십자가 아래 예수의 발치를 지키고 있는 여인은 매음굴을 전전하다 회개한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일이 있는데, 그로 인해 주로 예수의 발과 가까운 곳에 그려지곤 한다. 그림은 좌우 대칭의 르네상스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상단에는 두 천사가, 중앙에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그리고 하단에는 날개달린 천사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로 대칭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천사는 수건으로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 있다.
엘 그레코의 〈오순절〉이다. 1597-1600년. 《사도행전》(2장 1절~13절)에 기록된,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의 순간을 담고 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가 승천한 뒤 오순절을 함께 지내기 위해 모인 사도들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고, 이어 ‘불의 혀가 각자의 머리 위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강한 바람 소리와 불의 혀는 곧 성령 체험이자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쏟아내는 방언의 기적으로 해석되어 이후 이 작품은 ‘성령강림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된다. 엘 그레코는 빛과 어둠의 강한 대립, 강하고 거친 붓질과 연극 배우들처럼 과장된 자세를 취한 등장인물을 통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강한 심리적 압박감을 주고 있다.
엘 그레코의 〈부활〉이다.〈오순절〉과 같은 크기로 제작되어 있다. 아마도 이 둘은 제단의 양측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가 든 깃발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예수의 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단단하고 이상적인 신체를 살짝 벗어나 있다. 신비로운 빛에 둘러싸인 예수를 목격한 병사들은 소란스러울 만큼 과장된 자세로 현장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다. 놀라 나자빠진 병사의 몸과 공중에 떠 있는 예수의 몸이 서로 대조되며 묘한 긴장감을 유도한다. 현재 톨레도의 타베라 병원에 있는 조각상 〈부활한 예수〉는 엘 그레코가 직접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 그림 속 예수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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