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의 <에우로파의 납치>다.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 또는 아라크네의 우화>다. 1657년경. 리디아에서 염색업을 하던 아라크네라는 처녀가 있었다.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가 하늘을 찌르자 스스로 그 바닥 최고의 신인 미네르바(아테나)보다 자신의 실력이 더 낫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네르바는 노파로 변신해 아라크네와 실력을 겨루게 되었다. 아라크네의 불행은 그녀가 이 노파보다 진짜로 더 실력이 뛰어났다는 데서 시작된다. 분노한 미네르바가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켜 평생 실과 함께 살도록 저주를 내려버린 것이다. 그림은 공간 깊숙한 안쪽의 후경과 전경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벨라스케스는 두 부분의 관계에 대해 그 어떤 명확한 해석도 제시하지 않지만, 대체로 전경은 경합을 벌이는 장면이며, 후경은 이 시합의 결말 부분으로 본다. 후경 안쪽 아라크네가 완성한 태피스트리는 주피터르의 에우로페 납치 사건을 그린 티치아노의 작품을 모델로 한 것으로, 당시 스페인 왕실에 걸려 있었다. 아테나는 바람둥이 아버지 주피터르가 에우로페를 취하기 위해 황소로 변한 이야기를 주제로 태피스트리를 짠 아라크네에게 더욱 격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티치아노의 작품을 모사한 루벤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태피스트리 앞, 의자에 앉은 여인은 미네르바이다.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그녀는 주로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등장한다. 바로 곁에 있는 여인은 아라크네로 추정된다. 전경의 아라크네는 털실을 감고 있고, 노파로 변장한 미네르바는 물레를 돌리고 있다. 인간 아라크네의 신에 대한 도전은 화가 자신의 신의 경지에 오른 ‘천재적 실력’에 대한 일종의 은유로도 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벨라스케스는 전경 어둠 속에 묻힌 노파 미네르바의 모습을 환한 빛을 받고 있는 젊은 아라크네에 비해 다소 초라한 느낌으로 그려 넣었다. 인물들의 동작은 정확한 세부 묘사를 생략한 벨라스케스 특유의 성긴 붓질로 인해 더욱 활달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미네르바가 돌리고 있는 물레이다. 노파의 손과 물레 살에서 빠른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움직이는 물체들의 흩어지는 형태를 이토록 생생하게 잡아내는 화가는 당시로서는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3세기 후에나 미래주의 화가들이 시도했던 움직이는 사물의 시각화를 미리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불칸의 대장간>이다. 1630년. 화산을 연상시키는 용광로에서 일을 하느라 대장장이의 신으로 알려진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는 신화에 의하면 주피터르의 바람둥이 기질에 잔뜩 독을 품은 아내 주노(헤라)가 남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혼자 만들어 낳은 아이로, 화가 치민 주피터르의 발길질에 올림포스 산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아폴론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이가 바로 불카누스로, 그의 몸이 비스듬한 것은 바로 그의 다리가 성치 못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비운의 불카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내는 기막힌 기술로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급기야 미의 여신 비너스와의 결혼에도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바람둥이 양대 산맥’ 중 하나가 남신 주피터르라면, 여신은 단연코 비너스이다. 그녀는 마르스(아레스)와 사랑에 빠졌고, 그림은 이를 태양의 신 아폴론이 고자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 속 불카누스는 다른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대장장이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지만 군살 없이 탄탄하고 대리석 같은 피부를 지닌 그야말로 완벽한 몸매는 ‘인체의 이상화’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을 벨라스케스가 습득한 결과로 보인다. 오른쪽 일꾼이 막 다듬고 있는 갑옷은 빛이 닿는 부분에 일어나는 색의 변화를 면밀하게 잡아내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아폴론이 두르고 있는 붉은 옷의 색조를 빛의 강약에 따라 미묘하게 변주시켜낸다거나 쇠를 달구는 솥, 일꾼들이 걸친 옷가지 등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능력은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의 능숙함과 비견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애초에 누군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진일보된 기량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스페인으로 돌아오자마자 펠리페 4세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팔렸다.
벨라스케스의 <머큐리와 아르구스>다. 1659년.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함락〉이다. 1634-1635년. 펠리페 4세의 명에 따라 여러 화가들이 부엔레티로 궁정의 ‘세계의 전당’이라는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열두 점의 작품 중 하나로, 1625년 남부 네덜란드의 주요 요새 브레다 시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항복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펠리페 4세 시절 30여 년간 끌어온 전쟁은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전투만큼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소문난 장수를 무찔렀다는 일화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적을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 격인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은 브레다 성의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 장군이다. 브레다 성의 열쇠를 바치는 패장의 얼굴에는 슬픔과 체념이 가득하다. 오른쪽은 스페인의 암브로조 스피놀라 장군인데 자세를 낮춘 네덜란드 장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그의 얼굴을 따사롭게 쳐다보고 있다. 그는 상대 장군이 들고 있는 열쇠에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패자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다. 스페인은 넉 달 동안 브레다 성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성 내부로 가는 모든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립시켜 승리를 얻어냈다. 네덜란드는 명예 항복을 요청했고, 이에 스페인은 그들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한 채 성을 떠나도록 허락함으로써 승국의 관용까지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스페인의 사기를 한층 드높였으며, 스페인 최고의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에 의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다. 벨라스케스가 이 연극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스피놀라 장군 뒤로 하늘을 향해 빽빽이 치솟은 창들의 질서정연함은 승전국 병사들의 기개를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덕분에 작품 제목이 〈창검〉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면 오른쪽을 압도하는 말의 뒷모습은 네덜란드 장군의 뒤편에 서 있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등장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인 초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사실감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몇몇 인물들은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었고, 개인 초상화도 이미 제작한 적이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곳곳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신비감은 색과 빛,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데 치중한 베네치아 화가들을 연상시킨다. 전쟁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은 이 그림과 마찬가지로 후경은 격전지 혹은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배경으로 하고 전경에는 중심 인물들을 배치하곤 했다.
벨라스케스의 <아리아드네 동상을 가진 로마 빌라 메디치 정원의 모습 >이다. 1630년.
벨라스케스의 <로마 메디치 저택의 정원>이다. 16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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