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카디스 방어전>이다. 1634년. 이 작품은 스페인 왕실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구려졌고 마드리드 부엔레티로 궁에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과 나란히 걸려 있던 두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은 1625년 영국 윔블던 경이 이끄는 해군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카디스에서 한참 작전을 수행 중인 스페인 군 지휘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수페인 군대의 전략을 책임지고 있는 페르난도 지론 신부는 나이가 있어 의자에 앉은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수르바란이 주로 다루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기에 한동안 그가 아닌 유진 케식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는데 1927년 로베르토 롱기에 의해 그의 작품임이 알려졌다.나이든 군인의 초상이 종교화의 성자나 성직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자연주의에 몰두해 그린 그림으로 카라바조 화풍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1633-1640년.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은 17세기 스페인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인 세비야에서 도제 생활을 거친 뒤 그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배경에 정물과 인물들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인상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여운을 남긴다.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줄에 묶인 양을 그린 〈아누스 데이(하나님의 어린 양)〉는 연극 무대 같은 빛과, 극도로 자제된 색상, 모든 군더더기를 생략한 오직 ‘양 한 마리’만으로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 그 자체’를 설파한다.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포르투칼의 성 이자벨>이다. 1635년 1271년 아라곤의 공주인 세인트 엘리자베스는 피터 3세의 딸이자 정복자 제임스 1세의 손녀로 태어 났으며 1293년 포르투갈의 디오니시우스 왕과 결혼하여 그 나라의 여왕이 되었다. 그의 할머니 이모인 헝가리의 성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도상학이 때때로 혼란스러워지면서 그는 심오한 기독교, 자선 및 희생된 삶을 살았다. 1325년에 남편이 사망했을 때, 그녀는 클라리사 수녀로 공언하고 코임브라 수녀원에 입학하여 1336년에 사망했다. 그의 삶에서 기적적인 일화가 서술되어 그가 일반적으로 묘사되고 여기에서 수브라란이 사용하는 우상 공식을 불러 일으킨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녀의 자선 단체는 그녀를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을 전달하도록 옮겼다. 그녀의 디오니소스왕이 자선 단체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면서 옷의 주름에 돈을 숨겼다. 어느 날 디오니소스 왕은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놀라게 했고, 숨겨진 돈을 발견하기를 원했지만,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장미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포르투갈의 성 이사벨라가 무릎에 장미 한 덩어리로 묘사되는 이유다. 성 카실다는 일반적으로 더 어린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성 이사벨라는 여왕으로 적절하게 선정되어 호화로운 복장을 입고 성숙함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성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다. 1629년. 초대 교황으로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한 성 베드로의 모습을 그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성인 베드로 놀라스코(메르세데 수도원의 창립자)가 목격하고 놀라워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치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빛이 순교자의 몸을 환히 밝힌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빛과 어둠의 강력한 대비를 통한 절제와 명료함만으로 관람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이런 화풍은 역시 카라바조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수르바란은 카라바조의 명암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 스페인 화가로 칭송받으며 ‘스페인의 카라바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지나치게 금욕적인 그의 화풍에 흥미를 잃은 후원자들이 새로이 등장한 신세대 화가 무리요에게 환호하면서 주문이 극감해 빈곤 속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아르테미시아>다. 1634년. 이 그림은 샤스키아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여주인공은 기원전 4세기경 오늘날 터키 보드룸에 있던 카리아의 여왕 아르테미시아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지은 마우솔로스의 묘 ‘마우솔레움’은 그 거대함과 정교함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아르테미시아에 관해서는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그의 유해를 태운 뒤 남은 재를 잔에 넣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아르테미시아는 강한 부부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혹적인 빛을 듬뿍 받은 채 아르테미시아가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여종이 남편 마우솔로의 재가 들어있는 잔을 들고 앉아 있다. 렘브란트는 여종의 등에 닿는 빛뿐 아니라, 여왕을 비췄다가 반사되어 다시 여종의 얼굴을 밝히는 빛까지 그려냈다. 화면 왼쪽은 짙은 어둠이지만 여분의 빛으로 어렴풋하게 형체를 드러낸 또 다른 여종의 모습이 보인다. 1634년 레이덴 출신의 렘브란트는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고, 엄청난 지참금의 소유자였던 샤스키아와 결혼에 성공하면서 인생의 절정을 달리게 된다. 그러나 샤스키아가 죽은 뒤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감한 붓질에 물감 덩어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대담한 그의 화풍은 매끈한 채색과 명료하고 단정한 고전적인 취향으로 돌아선 네덜란드 사회에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그의 몰락은 비단 자신의 진보적인 그림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샤스키아가 죽자 그는 하녀로 있던 헤이르테 디르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렘브란트가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른 하녀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 일종의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발, 그를 법정에 세움으로써 엄격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던 네덜란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렘브란트는 이후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아 또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욕을 먹으면서도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은 아내 샤스키아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남겨진 유산을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놓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