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관/프라도미술관

고야 문제작 위주

boriburuuu 2020. 11. 22. 11:51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다. 1796-1798년. 녹색의 긴 소파 겸 침대 위에 풍성한 비단 쿠션과 비단 시트를 깔고 한 여인이 길게 누워 있다. 두 팔을 머리 뒤로 하고 누워 있는 그녀는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어떤 은밀함도 담겨있지 않으며 어떤 부분도 숨김없이 보여주며 시선을 맞받아치고 있다.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은은하게 감도는 빛을 받아 빛나는 인체, 신체 사이로 숨겨진 명암, 순백의 피부와 그 아래 접힌 천의 질감이 심장의 고동소리와 호흡까지 느껴질만큼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어떤 설명이나 구성에도 신경쓰지 않고 모델에게서 나오는 느낌에만 집중한 이 그림은 마네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고야의 <옷을 입은 마야>다. 1796-1798년경. 위의 그림과 같은 모델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다. 마야는 여인들이 외출할 때 입는 볼레로와 같은 재킷을 입고 있는데 허리에 두른 비단 띠와 금실로 수놓인 앞이 뾰족한 고급스러운 구두 등으로 상류사회의 높은 계급임을 알 수 있다. 마야는 상류층 여인의 우아함이나 정숙한 모습이 아닌 평민들의 자유로운 포즈와 행동을 하고 있다. 다양한 색의 조화가 이전 그림과는 다른 느낌을 주며 빛의 사용과 명암 표현에서 밤의 느낌이 든다. 고급스러운 의상이 여인의 몸을 타고 흐르며 다리의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어 옷을 벗은 마야를 생각나게 한다. 고야는 천재적 재능으로 풍요로운 색의 농도와 빛이 반사되는 표면을 매우 완벽하게 표현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혈통인 카를로스 4세가 스페인을 통치하던 시절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고, 혼란의 시기를 겪은 뒤 나폴레옹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자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 일족은 급기야 마드리드를 버리고 식민지 멕시코로 도주할 계획까지 세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스페인 국민들이 봉기하게 되는데 폭동의 중심에는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있었다. 폭동은 페르난도 7세의 즉위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와 카를로스 4세를 감금한 뒤, 자신의 형 조세프 보나파르트에게 스페인을 통치하도록 한다. 스페인 국민들은 나라의 주권을 프랑스인 왕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사실에 격분해 응집하게 되었고, 소규모 전쟁을 감행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아랍 지역으로부터 용병까지 불러들여 스페인 국민의 저항에 대치했다.

고야의 <1808년 5월 2일 >이다. 1814년.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스 군인이 말을 타고 가다 떨어져 폭행을 당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말을 타고 있는 기병대들은 프랑스의 뮈라장군이 이끄는 이집트 기마병 맘크루라고 하는데 그들의 모습에서 에전의 스페인과 무어인과의 갈등을 떠올릴 수 있다. 양측은 격렬하게 맞서는데, 고야는 아랍식 복장을 한 이집트 친위대와 프랑스군, 그리고 스페인 시민이 벌인 싸움을 영웅적 관점보다는 ‘광기와 살육의 고발’로 그려냈다. 기존의 화가들이 그린 전투 장면과 달리 이 모든 분란을 잠재울 ‘영웅’이 부재한 상태다.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로 물든 전쟁의 참혹함을 사실적으로 고발하듯 그려냈다.

고야의 <5월 3일>이다. 1814년. 프랑스의 반격은 5월 3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마드리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다. 고야는 총을 든 프랑스 군인들 앞에서 마치 기계처럼 죽어가거나 투항하는 이들을 순교자처럼 묘사했다. 특히 중앙의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고야는 남자의 손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상흔을 그려 넣었고, 유난히 그에게만 밝은 빛을 비추어 종교화에서 흔히 그려지던 ‘후광’을 대신했다. 이 날의 총성은 새벽 4시경에 시작되었고 이 총성과 함께 43명의 반란자들이 죽었다고 한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 위로 처현된 시체들이 서로 겹쳐져 있다. 총알을 맞고 쓰러진 시체의 위아래로 흘러내린 피는 마치 공기와 접촉해 방금 응고된 것 같아 보이며 실제의 피가 아닌가할 정도로 생생한 느낌을 준다. 나폴레옹의 포병들은 몬클로어시의 외곽에서 처형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작품 외에도 이날의 참화를 그린 몇 작품이 있다. 이 두 그림은 사건이 종료된 지 약 6년 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왕권을 탈환한 페르난도 7세 치하에서 그려졌다. 그는 전보다 더 강력한 독재 정치를 펼쳐 또 한 번 스페인 민중을 좌절시켰지만, 어찌됐든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고야는 이 그림들로 국왕의 환심을 사고 싶어 했다. 페르난도 7세는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위해서도 일했던 고야에게 궁정화가로서의 직책은 보전해주었지만, 이 그림들을 전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일개 시민을 예수급 영웅으로 묘사한 이 그림이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야의 <사투르누스>다.  1819년.  생계를 위한 타협의 그림을 반복하며 자기 앞의 생을 이어나갔다. 말년에 그는 마드리드 교외에 집을 구했다. 이미 병으로 청력까지 상실한 고야는 심각하게 쇠약해진 상태에서 첫 부인과 사별한 뒤 만난 마지막 연인 레오카디아 웨이스와 함께 지낸다.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쉬운 이 관계를 숨기느라 레오카디아 웨이스는 가정부로 위장했고, 고야는 외부인의 출입을 되도록 금한 채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고야는 일명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리는 그 집의 방 두 개의 벽에 석고를 바른 뒤 유화를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그림들은 주로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갈색조를 이루고 있어 ‘검은 그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현재 캔버스에 유화로 옮겨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혹은 보관되고 있다. 검은 그림들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뒤 남게 되는 지독한 회의주의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광기와 절망 그리고 고독의 세계를 담고 있다.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간의 신이다. 포악한 사투르누스가 피를 뚝뚝 흘리는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모습을, 고야는 역시나 포악하고 거친 붓질로 그려냈다. 신화 속 사투르누스는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가이아의 요청을 받고 아버지를 낫으로 찔러 죽인 뒤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이후 그는 아내 레아와 낳은 자식들이 자신의 왕위를 뺏을 거라는 신탁을 듣고 그들을 하나하나 잡아먹기 시작했다. 낫을 들고 다녀 농경의 신으로도 숭앙받는 사투르누스는 그 잔인함과 냉정함으로 시간의 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냉정한 것은 바로 시간이니 말이다. 아마도 눈을 허옇게 뒤집은 채 산 채로 자식을 잡아먹는 이 사투르누스는 호시탐탐 스페인을 노리는 프랑스를, 혹은 자유를 선망하는 국민들의 뜻을 짓밟는 스페인 지도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의 이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인간 광기 그 자체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고야의 <성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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