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친촌백작부인>이다. 남동생이 친촌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작위를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왕인 카를로스 4세와는 사촌 간으로, 왕의 최측근인 마누엘 고도이와 결혼했다.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애인이었고, 물론 그에게는 왕비 외의 다른 애인도 있었다. 고야가 이 여인을 그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닌데, 백작부인의 아버지이자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인판테 돈 루이스 가족의 그룹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3살 때의 백작부인을 단독 초상화로 그린 적도 있었다. 이 초상화를 그릴 때 스무 살이었던 백작부인은 임신 중이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상화 모델로 앉아 있을 때 남편인 마누엘 고도이가 언제 오는지 하도 기다리는 통에 약간만 인기척이 나도 뒤를 자꾸 돌아봤다고 한다. 이런 상태를 표현한 고야의 방식은, 화면 왼쪽 앞을 향해 앉아 있지만 고개는 약간 오른쪽 뒤로 돌리고 있는 백작부인의 자세다.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은 부인의 손에 있는 반지에서도 보인다. 반지에 작고 둥근 미니어처 초상화가 붙어 있는데, 남편 고도이의 초상화라고 한다. 고야는 모델의 아버지인 돈 루이스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을 테고,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아이가 자라서 결혼하고 아기까지 가진 것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도이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남편을 좋아하는 젊은 부인이 애처로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야는 백작부인을 청순하고 연약하게 그렸다. 어쩌면 임신한 여인들 특유의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초상화에는 모델인 친촌 백작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화가인 고야의 감정도 투영되어 있다. 이것이 고야의 초상화가 가지는 특징이자 힘이다. 바로 대상의 내면까지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고야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이다. 1800년경. 이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모신 카를로스 4세 왕가의 집단 초상화이다. 얼핏 보면 잠시 틈을 내 모인 왕가의 일원들이 번쩍거리는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자신들의 권위를 한껏 과시하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많은 부분에서 이 무능력한 왕가를 고야가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정중앙에는 왕이 차지하고 있기 마련인데 그곳에 왕비가 서 있다는 사실은 무너진 가장의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이가 성하지 못했던 왕비의 합죽한 얼굴, 그 얼굴보다 더 두터운 거대한 팔뚝 등은 고야가 그녀를 위해 그 어떤 이상화도 시도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왕의 모습도 마치 술에 취한 듯 얼굴 가득 붉은 기운이 감돌아 어딘가 모르게 얼빠져 보인다. 도드라져 보이는 매부리코는 붓 끝만 조금 줄였어도 충분히 감출 수 있었겠지만 고야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튀어나온 배는 왕의 게으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두 부부 이외의 인물들도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곤 죄다 멍해 보이거나 야릇해 보인다. 고야는 화면 왼쪽 귀퉁이의 자신을 제외한 이 왕가의 인물을 아기까지 포함해서 열세 명 그려 넣었는데, 순전히 우연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왕가에 대한 불쾌감을 저주의 숫자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재상인 고도이와 놀아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린 채 사냥에만 몰두했다. 고도이와 왕비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르는 동안 둘의 사랑은 훨훨 타올라 왕비가 낳은 두 아이가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두 아이는 왕비 좌우에 서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수많은 실정을 저질렀고, 결국은 아들 페르난도 7세에 의해 폐위되는 치욕까지 맞보았다. 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바로 아버지를 배반한 페르난도 7세이다.
고야의 ,자화상>이다. 1815년. 이 그림은 고야가 69세 되던 해로 귀가 들리지 않은지 오래된 때다. 1808년-1813년까지 나폴레옹의 침입과 스페인 독립 전쟁의 잔인한 실상을 경험하고 전쟁이 끝난 뒤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했다. 고야는 부인과 사별한지 3년이 되었고 괴로은 시간을 견디며 깨달은 현자같은 분위기가 난다. 목주위의 셔츠가 풀려 있고 턱 밑으로 어둡게 그림자 진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렘브란트에 이르는 거장들의 특징을 모노톤으로 모두 표현해내고 있다. 깊은 자아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몇 안되는 색상만으로 표현하고 필수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며 빠르게 지나가는 붓터치로 우울하게 표현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복잡함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순간적인 힘을 발휘한다.
고야의 <타데아 아리아스 데 엔리케즈 >다. 1789년.
고야의 <카를 4세>다. 1789년.
고야의 <발라브라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이다. 17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