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4

boriburuuu 2020. 12. 7. 22:49

고흐의 <신발>이다. 1886년.  헐렁한 신발은 그림의 특이한 주제였다. 파리에 있는 반 고흐의 한 지인은 벼룩시장에서 어떻게 낡은 작업화를 샀는지 묘사했다. 그리고는 그것이 더러워질 때까지 그들 안의 진흙을 걸어갔다. 그때서야 그는 그들이 그림을 그릴 만큼 재미있다고 느꼈다. 반 고흐는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정물화를 만들었다. 그는 또 다른 그림 위에 신발을 그렸다.

 고흐의 ,스톤 쿼리가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 >이다. 1886년.  몽마르트르의 파리 지역은 그곳에서 살고 일하는 예술가들로 잘 알려져 있다. 반 고흐의 시대에는 이미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그 후 한쪽에만 건물이 있었다. 여기, 반 고흐는 다른 쪽을 그렸다. 이미 지구 건설 지역에 흡수된 채석장과 제분소의 경치를 볼 수 있다. 전경에는 나무 더미가 있다. 그 뒤에는 돌덩어리가 있다.

고흐의 <파리의 풍경>이다. 1886년.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반 고흐는 파리의 남쪽 경치를 그렸다. 그는 전경의 지붕과 굴뚝을 가까이서 보이게 함으로써 그림의 깊이를 만들었다. 더 멀리, 기념비적인 건물들의 윤곽이 도심에서 보인다. 판테온, 루브르, 노트르담; 그들 모두는 확인되었다. 반 고흐는 건물을 나머지 풍경에 비례하여 상당히 크고 상세하게 만들었다. 아마 망원경을 사용했을 것이다.

고흐의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이다. 1887년.  반 고흐는 거의 2년 동안 파리에 있었던 1887-88년 겨울에 이 자화상을 그렸다. 그가 Pointillists의 기술을 연구하고 자신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적용했다는 것은 작품에서 분명하다. 그는 페인트의 짧은 줄무늬를 다른 방향으로 놓았다. 그들이 그의 머리 윤곽을 따르는 곳에서, 그들은 일종의 후광을 형성한다. 이 그림은 또한 파리에서 반 고흐의 가장 대담한 색채 실험 중 하나이다. 그는 긴 붓놀림을 사용하여 서로 보완적인 색상을 배치했다. 배경에는 파란색과 주황색, 턱수염과 눈에는 빨간색과 녹색. 색이 서로 강화된다. 붉은 색소가 희미해져 보라색 스트로크는 이제 파란색으로, 노란색과의 대조가 덜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흐의 <카페에서 : 탐부린의아고스티나 세가토리>다. 1887년.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는 카페 뒤 탐부린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반 고흐와 잠깐 관계를 가졌다. 이블 위에 맥주 한 잔이 놓여 있고, 아고스티나는 불을 붙인 담배를 들고 있다. 테이블 위의 유리잔 밑의 접시들은 그녀가 두 번째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존경할 만한 숙녀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방식은 예술적 유형과 매춘부와 관련이 있었다.이 초상화의 배경에는 일본인의 지문이 보인다. 그는 전시회 동안 아고스티나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고흐의 <감귤과 함께 캐러페와 디쉬 >다. 1887년.  유리 물체를 그리는 것은 어렵다. 반 고흐는 정교한 캐러피와 장식용 벽지를 선택하면서 도전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그는 유리에 화려한 반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레몬 접시 아래 테이블이 위로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반 고흐는 일본 목판화에서 배운 원근법 기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강한 대각선은 그를 매료시켰다. 빈센트는 이 정물화에 서명하고 날자를 썼다.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해야만 그렇게 했다.

고흐의 <퀸스, 레몬, 배, 포도의 정물화>다. 1887년.  반 고흐가 파리에서 현대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사용한 어두운 네덜란드 색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정물화와 함께 자신이 진정한 색채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거의 전적으로 노란색의 그늘과 약간의 녹색, 파란색, 빨간색, 분홍색으로 칠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모직 실을 사용하여 색 조합을 시도했다. 반 고흐도 이 작품의 틀을 그렸다. 그것은 살아남은 유일한 원래의 틀이다. 그는 테오에게 그림을 바쳤는데, 테오는 종종 그의 작품에 더 많은 색을 더하도록 격려했다.

고흐의 <하얀 과수원>이다. 1887년.  반 고흐가 선택한 관점은 나뭇가지의 얽힌 곳을 향해 시선을 위로 안내한다. 그림을 보면 마치 꽃이 피는 나무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반 고흐가 아를레스에 도착한 직후 봄이 왔다. 도시 주변에는 과일 과수원이 많이 있었다. 그는 꽃에 과수원에 대한 많은 연구를 열렬히 그렸다. 이 매실나무들은 긴 가지가 보여주듯이 잘 유지되지 않았다. 반 고흐는 특히 이런 오래된 나무들을 좋아했다.

고흐의 <분홍 복숭아 나무>다. 1888년.  반 고흐는 아를레스(FR)에서 첫 주 동안 많은 과일 과수원을 그렸다. 반 고흐가 한 자리에서 완성한 이 그림의 이전, 거의 동일한 버전이 있다. “아니오를 위해 일한 적이 있어요. 과수원에서 20개의 캔버스 - 쟁기질한 라일락 들판, 갈대 울타리 - 영광스러운 푸른색과 하얀 하늘에 두 개의 분홍색 복숭아 나무. 아마 내가 한 것 중 가장 좋은 풍경일 거야.’라고 그가 썼다. 귀국했을 때 삼촌 안톤 마우브의 사망통지서를  보았다. 마우브는 반 고흐가 한때 교훈을 얻었던 유명한 화가였다. 그는 그 첫 작품을 마우브에게 바쳤고 나중에 테오에게 보내기 위해 이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다.

고흐의 <핑크 과수원.이다. 1888년.  1888년 2월 반 고흐가 알레스(FR)에 도착했을 때 겨울은 여전히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다. 몇 주 후, 봄이 왔다. 열정으로 가득 찬 그는 꽃이 피는 나무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그림들을 나란히 보았을 때, 그것들을 삼부작으로 결합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부작에서는 세 작품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로 합쳐진다. 반 고흐는 일본인의 지문에서 나온 이 생각에 익숙했다. 반 고흐는 한 달 동안 꽃을 피운 과일나무 그림 14점을 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과수원 그림이 팔릴 것을 바랐다. 그의 동생 테오에게 그는 '이 주제들이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는 주제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썼다.

고흐의 <레스 세인테스-마리-데-라-메르 해변의 어선>이다. 1888년.  이 어부들의 보트가 왜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알 수 있는가?,모래사장의 불규칙한 표면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2차원적인 방법으로 그려져 왔다. 그 배들은 강한 윤곽 안에서 균일한 색깔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배들은 해변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적 요소들은 반 고흐가 일본 판화를 수집한 것에서 친숙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해변에서 만드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부들은 매일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보트를 그렸고, 나중에 이 그림을 집에서 그렸다

고흐의 <건초더미>다.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알레스 주변의 평평한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서 건조함과 열기를 거의 느낄 수 있다. 반 고흐는 하늘의 푸른 하늘과 노랗고 초록색의 음색을 결합하여 여름의 분위기를 포착했다. 그는 불타는 태양 아래서 한 번에 며칠씩 밀밭에서 일했다. 폭우와 수확 시즌을 끝낼 때까지 일주일 만에 10점의 그림과 5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반 고흐는 농민의 삶과 그의 예술에서 반복되는 주제인 땅에서 일하고 싶어했고 수확의 여러 단계를 그렸다. 우리는 반 깎은 밀밭, 사다리, 그리고 여러 개의 카트를 본다. 리퍼는 배경에서 작동하는데, 그래서 그는 작품의 제목을 라 모이슨 또는 '하베스트'라고 지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그의 동생 테오에게 '칸바스가 나머지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죽인다'고 쓰면서 가장 성공적인 그림 중 하나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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