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5

boriburuuu 2020. 12. 7. 23:40

고흐의 <밀밭의 농가>다.  반 고흐는 아를레스(FR) 근처의 들판에 있는 이 농가를 위해 밝고 혼합되지 않은 색상을 사용했다. 이 작품은 그가 파리에서 배운 것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그는 인상주의와 포인틸리즘을 포함한 다양한 새로운 예술 운동에 직면했었다. 그는 남부 도시인 아를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배운 모든 것을 사용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붓놀림을 점과 반점에서부터 더 큰 스트로크로 바꾸었다. 이 그림에서 그 기술은 나무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인다.

고희의 <이를 근처의 아이리스가 있는 들판>이다. 1888년.  반 고흐는 아를레스 마을 주변의 풍경의 색깔에 사로잡혔다. 그는 특히 들판의 노란 꽃과 보라색 꽃의 대조를 좋아했다. 풍경 속에서 그는 일본인의 지문을 수집하여 알고 있는 세계의 반성을 볼 수 있다고 느꼈다. 일본 예술가들은 그들의 그림에 많은 색의 영역을 사용했는데, 종종 날카로운 대각선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또한 전경에 있는 세부사항을 정기적으로 확대했다. 반 고흐는 그의 그림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치 '일본인의 꿈'과 같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고희의 <채석장 입구>다. 1889년.  빈센트는 자신의 그림 입구를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고 색깔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의도했다. 그가 어두운 컬러로 돌아온 것은 프랑스로 이주한 이후 처음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항상 어두운 색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인상파의 밝은 색조를 채택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다른 색소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네덜란드 작품과는 매우 다르게 밝혀졌다. 이 그림을 작업하는 동안 반 고흐는 몸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이 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결과에 만족했다: '건강한 것이 있다. 그래서 나를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고흐의 <양털깎는 여인(밀레)>이다. 1889년.  반 고흐는 양을 깎는 이 여인을 ‘라일락에서 노란색까지 다양한 색깔의 색으로’ 그렸다. 그는 편지에서 그가 수감자였던 생레미의 정신과 클리닉에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고 말했다. 빈센트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베끼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흑백 인쇄물에서 작업하여 이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복사했지만 직접 색상을 선택했다. 그는 이 그림을 작은 나무 판화에 기초를 두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10부작의 판화 시리즈인 트라보 데 챔프('필드에서의 작업')의 일부였다.

고희의 <잎이 떨어진, 세인트 폴 병원의 정원>이다. 1889년.  반 고흐는 1889년에 자신이 입원한 병원 주변의 큰 정원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가을에 그는 이 그림을 만들었는데, 그는 그것을 '잎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불렀다. 계절적 분위기는 색깔, 외로운 워커, 바람에 날려버린 잎에 의해 제안된다.

고흐의 <고갱의 의자>다. 1888년. 폴 고갱의 의자를 그린 이 그림은 반 고흐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의 '초상'이다. 녹색 좌석 쿠션에 있는 현대 소설과 불타는 촛불은 부재한 화가의 성격을 상징한다. 반 고흐는 주로 빨간색과 녹색 색조를 사용하여 밤의 분위기를 제안하려고 했다. 그는 또한 이 작품의 펜던트를 낮의 분위기로 그렸다. 즉, 밝은 노란색과 파란색의 자신의 단순한 농민 의자였다. 두 그림은 두 예술가의 다른 성격을 대표하며, 곧이어 말다툼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갔다.
반 고흐는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능숙하게 포착하고 의자의 윤이 나는 나무에 빛을 반사했다. 이것들은 가스 조명에 의해 만들어졌다(가스 램프는 배경에서 볼 수 있다).

고흐의 <저성장>이다. 1889년.  이 반 고흐 그림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있는 정원의 한 구석을 보여준다. "나도 아이비와 함께 새로운 아이비도 있어." 그가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그는 2년 전에 파리 근처에서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언뜻 보기에 여기 보이는 것은 담쟁이덩굴과 땅바닥에 빛 조각이 흩어져 있는 나무 줄기뿐이다.하지만 이 그림을 확대하면, 느슨한 붓놀림의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스트로크는 대부분 짧고 놀랍게도 색상이 다양하다.유일한 긴 줄은 나무의 윤곽이다.

고흐의 <병과 토기가 있는 정물화 >다. 1885년.  반 고흐가 아마추어 예술가들에게 그림 수업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아인트호벤에는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세 명 있고, 정물화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반 고흐는 학생들이 비슷한 정물화로 바쁜 동안 이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는 3년 전 그림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정물화가 가장 좋은 시작이라고 느꼈다.

고흐의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이다. 1887년.  반 고흐가 종종 모델을 살 여유가 없었던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그림 그리기를 연습하기 위해 그는 자화상을 만드는 데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보았는지에 대한 인상을 받는다. 그의 초상화 사진은 단 한 장뿐이고 둘 다 어른으로서 그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파리에 살 때 이 자화상을 그렸다. 새로운 캔버스 값을 지불할 수 없었던 그는 이전의 정물화의 뒷면을 사용했다.

고흐의 <늙은 남자의 초상>이다. 1885년.  반 고흐는 1885년 11월 말부터 1886년 2월 말까지 살았던 앤트워프(BE)에서 이 남자를 그렸다. 그는 반 고흐가 그의 형 테오에게 쓴 것처럼 인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멋진 노인과 내일 약속이 있다. 그가 올까??' 반 고흐는 적절한 모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모델들은 비쌌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하기 위해 나타났다. 반 고흐는 그 남자의 턱수염이 그를 작가 빅터 휴고처럼 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거칠지만 잘 배치된 붓놀림을 사용하여 그는 설득력 있는 초상화를 만들었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1887년.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빨간 수염과 진지한 눈빛을 가진 이 남자를 알아본다. 빈센트 반 고흐는 총 35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대부분은 파리에서 그렸다. 그에게 이것은 초상화를 연습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의도는 자신을 가능한 한 현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짧고 거친 붓놀림으로 네오 인상주의 스타일을 사용했다. 이것들은 그의 턱수염에 있는 오렌지와 같은 더 긴 스트로크로 번갈아 가며 일어난다. 배경은 원래 보라색(빨간색과 파랑색의 혼합)이었지만 붉은 색소는 변색되어 거의 완전히 투명해졌다

고흐의 <주아베>다. 1888년.  그는 '저속하고, 심지어 이것처럼 화려한 초상화를 작업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를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내 일에 대해 묻는 것이다.',색 대비를 위해 그는 오른쪽에 빨간 벽돌을 그렸다. 그런 벽돌은 아를레스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반 고흐는 이 보병을 그리고 그릴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모델들과 함께 일하는 것만큼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지 못했다.

'네덜란드의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센트 반 고흐 7  (0) 2020.12.08
빈센트 반 고흐 6  (0) 2020.12.08
빈센트 반 고흐 4  (0) 2020.12.07
빈센트 반 고흐 3  (0) 2020.12.07
빈센트 반 고흐 2  (0) 2020.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