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7

boriburuuu 2020. 12. 8. 11:59

고흐의 <브라반트의 회상>이다. 1890년.  이 풍경은 반 고흐의 어려운 시기 중 하나에 그려졌다. 그는 생레미에 있는 병원에 있었다. 그는 실내에 머물러야 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때, 주제를 찾아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그의 고향 브라반트 지역의 몇 가지 '기억'을 그렸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에 대해 썼다. '그리고 내 병이 최악인 동안, 나는 여전히 브라반트를 연상시키는 것,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과 함께 가을 저녁에 이끼 낀 지붕과 너도밤나무 울타리가 있는 오두막, 붉은 구름에 붉게 물든 태양을 그렸다.' 고.

고흐의 <애꾸눈 남자의 초상>이다. 1889년.  이 남자의 한쪽 눈은 눈에 띄게 강렬한 청록색을 가지고 있다. 반 고흐는 그림의 배경에서 같은 색을 사용했다. 다른 눈꺼풀은 닫혀 있다. 그 남자는 한쪽 눈이 멀거나 눈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 그는 반 고흐가 1년 동안 머물렀던 생레미의 정신과 병원 환자 중 한 명이었다. 반 고흐는 때때로 다른 환자들을 두려워했지만, 그 중 두 사람의 초상화를 만들었다. 담배 끝부분이 마치 남자가 막 한 모금 빨아들인 것처럼 밝게 타오르고 있다. 

고흐의 <빗속의 다리>다. 1887년.  반 고흐는 밝은 색과 독특한 그림으로 일본 목판화를 크게 존경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인쇄물에 빗속의 다리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반 고흐는 원색보다 색을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작품을 표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렸다.

고흐의 <궁녀>다. 1887년.  반 고흐는 이 그림을 일본 화가 케사이 아이젠의 목판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인쇄물은 1886년 파리 일러스트레 잡지의 표지에 재현되었다. 반 고흐는 일본인의 모습을 복사하고 확대하기 위해 격자를 사용했다. 그는 마치 목판화처럼 밝은 색과 대담한 윤곽을 사용했다. 우리는 그 여자가 머리 모양과 허리띠(오비)로 궁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뒷모습이 아니라 기모노 앞부분에 묶여 있다. 반 고흐는 수련, 대나무 줄기, 크레인, 개구리가 가득한 연못으로 그녀를 그려냈다. 이 장면은 숨겨진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grue (crane)와 grenouille (개구리)는 '대리인'을 위한 프랑스어 속어였다. 

고흐의 <레스 세인테스-마리-데-라-메르 근처의 바다 풍경 >이다. 1888년.  그는 과감한 스트로크로 캔버스에 닦은 파란색과 흰색 외에도 파도에 녹색과 노란색을 사용했다. 그는 이 색깔들을 팔레트 칼로 바르고, 파도를 통해 빛의 효과를 깔끔하게 포착했다. 반 고흐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지중해의 색깔에 열광했다. 밝은 빨간색 서명은 전경에 눈에 띄게 배치되었다.  

교흐의 <가죽신발 한 쌍>이다. 1889년.  반 고흐는 신발을 반복해서 그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프랑스 남부 마을인 생레미에 이 나무로 된 가죽 나막신을 그렸다. 그는 병원에서 정신 질환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 밖에 나가는 것을 꺼렸다.그러나 그는 몸이 좋아지자마자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가 이 나막신들을 그린 것은 이때였다. 나막신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기울어진 표면에 클로즈업으로 나타난다. 반 고흐는 전에도 이런 특이한 관점을 채택했었다. 작은 줄무늬의 꼼꼼한 패턴은 2년 전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고희의 <시들고 씨가 맺은 해바라기>다. 1887년.

고흐의 <두여인과 사이프러스>다. 1890년.  가느다란 사이프러스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풍경의 특징이다. 그는 사이프러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모양과 비율을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그것과 비교했다. 그는 나무를 녹색과 검은 색의 다양한 색조로 소용돌이치는 붓놀림으로 칠했고, 때때로 대조를 위해 붉은색을 띠었다. 나무의 색깔은 도전적이었다 – 반 고흐는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것을 '그 어려운 병 녹색 그늘'이라고 불렀다. 

고흐의 <새우와 굴>이다. 1886년.  반 고흐는 항상 정물화에 대한 새로운 주제를 찾아냈다. 여기서 그는 조개류를 사용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는 아마 그날 저녁으로 그것들을 먹었을 것이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폴 고갱은 이 작은 그림을 보았다. 몇 년 후, 그는 반 고흐에 대한 기억에 대해 쓸 때 그것을 언급했다. 고갱은 반 고흐가 이 그림을 5프랑에 딜러에게 팔았고 그 직후 그 돈을 길거리의 가난한 젊은 여성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했다.

고흐의 <뒤집어진 게>다. 1887년.  여기서 반 고흐는 게를 녹색 배경에 밝은 붉은 색조로 칠했다.그는 프랑스 화가 외젠 델라크루아가 묘사한 '색깔의 법칙'을 실험하고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빨간색과 녹색과 같은 색깔은 한 쌍을 형성한보색이다.  나란히 놓으면 둘 다 더 강한 효과를 가진다. 반 고흐는 델라크루아의 위대한 숭배자였으며 찰스 블랑의 책에서 그의 색채 이론에 대해 배웠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1887년.  반 고흐는 파리에 있는 동안 2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아마 모델들을 위한 돈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푸른색 스모크 프록의 예술가로 묘사한다. 그림 그리는 동안 입었던 옷이었다. 반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 뒷면에 이것을 그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델뿐만 아니라 비싼 캔버스의 비용도 피했다

고희의 <에티엔 루시엔 마틴의 초상화 >다. 1887년.  마틴은 고흐가 단골로 가던 식당 주인이었는데 고흐의 작품과 친구들의 전시회를 열도록 허락했다. 반 고흐는 아마도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이 초상화를 그렸을 텐데 마틴은 그림들이 고객들의 식욕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해 말다툼을 해서 전시는 일찍 끝났고  마틴은 그림을 받지 못했다. 반 고흐는 작업복을 입은 그를 그렸다. 그는 원래 초상화에 더 밝은 색을 사용했지만 마음을 바꾸고 대신 어두운 색을 선택했다. 붉은 색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져 의도하지 않게 반 고흐가 의도한 것보다 색이 더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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