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8

boriburuuu 2020. 12. 8. 12:38

고흐의 <가을의 포플라나무 길>이다. 1884년.

 고흐의 <글라디오리와 중국 아스터를 가진 꽃병 >이다. 1886년.  이것은 반 고흐가 1886년 여름 파리에서 그린 35개 이상의 꽃 정물 중 하나다. 그는 꽃 그림이 잘 팔리기를 바랐다. 이것들은 또한 색깔과 느슨한 스타일의 그림 사용에서 운동이었다. 이 정물화에서 그는 보완적인 색상으로 강한 색상 대비를 가지고 일하면서 녹색과 빨간색을 나란히 배치하거나 파란색과 주황색을 배치했다.

고흐의 <밀밭>이다. 1889년.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태양 바로 저 멀리 밀밭에서 일주일 동안 집중적인 노고를 했다"고 썼다. 그는 붓놀림과 색깔을 실험하느라 바빴다. 예를 들어, 이 그림에서. 여기서 그는 전경에 있는 식물을 위해 많은 다른 색깔의 소용돌이와 함께 잘 익은 밀의 황금색 노란색을 병치한다. 지평선이 높아서 들판이 거의 전체 그림을 차지하고 있다. 반 고흐는 그해 여름에 이 주제를 여러 번 그렸다. 그는 친구 마일 버나드에게 '오래된 금빛 노란 풍경 -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침묵하고 있는 리퍼처럼 빠르고 서둘러 일을 끝내는 데 집중했다'고 썼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1887년.  이 자화상은 반 고흐가 그린 가장 작은 유화 중 하나이다. 사실, 그것은 완성된 그림이라기 보다는 기름 스케치에 가깝다. 그는 싸구려 카드를 사용했고 꽤 넓은 붓으로 빠르게 일했다. 그의 눈의 초록색과 수염의 오렌지색이  튀어나온다. 그 효과는 그림의 다른 곳에서 주로 어두운 색상을 사용함으로써 향상된다. 그러나 원래 그의 얼굴은 더 다채로웠다; 연구는물감의 붉은 색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졌다는 것을 밝혀냈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1887년.  반 고흐는 언젠가 동생 테오에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도 쉽지 않다"고 썼다.그는 우아한 정장과 펠트 모자를 쓰고 이 자화상을 존경할 만한 부르주아로 내세운다. 이 작은 그림은 파스텔 회색-파란 색조로 그려져 있다. 반 고흐에게는 이례적인 팔레트였는데, 반 고흐는 눈 색깔을 그에 맞추기 위해 바꾸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녹색이었지만, 이 그림에서 회색-파란색으로 보여진다. 밝은 붉은 수염이 회색 톤에 강하게 돋보인다.

 고흐의 <자화상이거나 테오의 초상>이다.  1887년. 이 그림은 오랫동안 빈센트의 자화상으로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그의 형제 테오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형제는, 즉, 서로 현저하게 닮았다. 불행하게도, 누가 실제로 묘사되었는지 결정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며, 그래서 이 그림은 현재 이중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 초상화는 유별나게 작고 상당히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반 고흐는 아마도 초상화 사진과 경쟁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사진작가가 기계로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 외에 인간에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 원인이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1886년.  반 고흐는 파리에서만 20개가 넘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각각의 자화상에서 그는 다르게 보인다. 그는 이러한 자화상을 초상화의 기술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얼굴 표정, 색깔, 형태를 실험했다. 파리에서 반 고흐는 아돌페 몬티첼리의 작품을 발견했다. 그는 이 나이든 프랑스 화가가 풍부한 색상 팔레트와 두꺼운 물감칠을 한 것에 대해 감탄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색과 빛 효과에 대한 몬티첼리의 접근법을 시도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 톤이 따뜻하고 검붉은 배경에 극명하게 돋보인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1886년.

고흐의 <,화가로서의 자화상>이다. 1886년 이것은 반 고흐가 그린 최초의 자화상 중 하나이며, 자신을 예술가로 묘사한 첫 번째 작품이다. 그는 팔레트를 들고 이젤앞에 서 있다.네덜란드와 앤트워프(BE)에서 5년 넘게 연습한 끝에 파리에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직사각형 팔레트는 페인트 조각으로 덮여 있고 순수하고 혼합되지 않은 색이다. 꼭대기에는 물감을 얇게 하기 위한 작은 테레빈유 항아리가 있고 팔레트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하나는 반 고흐의 엄지 손가락과 다른 두 개의 브러시를 보인다.

고흐의 <마르셀 룰랭의 초상화>다. 1888년.  이 통통한 아기는 우체부 조셉 롤린의 막내 아이였는데, 그는 반 고흐의 그림을 아를레스에서 파리로 보냈다. 두 남자는 친구가 되었고 반 고흐는 롤린의 가족 전체를 그렸다: '남자, 그의 아내, 아기, 어린 소년, 그리고 16살 된 아들,  그는 아기 마르셀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세 장은 혼자서, 두 장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 더 그렸다. 반 고흐는 작은 초상화를 테오에게 보냈다. 당시 임신한 테오의 아내 조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의 것이 그만큼 강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그의 삼촌이 언젠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동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고흐의 <유리잔과 함께 있는 자화상>이다. 1887년.  이 사진에서 반 고흐는 손에 잘 채워진 유리잔을 들고 앉아 있는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문제 음주자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는 특히 파리에서의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자화상을 제작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종종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이전 작품들에 그것들을 그렸다. 연구에 따르면 파이프 흡연 자화상 아래 반누드 여성이 밝혀졌다. '

고흐의 <농민 여성 바인딩 셰브스(밀레 이후) >다. 1889년.  이것은 장 프랑수아 밀레가 판화한 반 고흐가 그린 20부 중 하나이다. 그는 생레미에 있는 망명 중에 그것들을 만들었다. 밀레와 그가 존경했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연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병으로 심각하게 손상된 자신감을 재건하려고 시도했다. 모델이 없는데도 그림 그리기를 연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반 고흐는 이 작품들을 단순한 사본으로 보지 않았지만, 비록 그가 그 장면을 꼼꼼하게 재현했다. 대신 그는 그것들을 흑백의 판화를 화려한 그림으로 각색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음악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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