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캄보디아

프놈펜의 킬링필드 등을 돌아보며

boriburuuu 2016. 3. 11. 16:40

아침 5시에 일어나 일정 등을 살펴보고, 정시에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06:30). 그러나 일행은 물론 다른 관광객들도 자리를 잡고 한참 먹고 있었다. 뷔페식이었는데, 음식 통은 거의 비어있었다. 식당 종업원들은 떨어진 음식을 계속 보충하고 있었으나, 금방 바닥이 났다. 특히 과일은 보충하는 즉시 빈 접시였다. 아마 인원에 비해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음식은 남기 시작했다.

 

 일행은 8시에 호텔을 출발해, 공원에서 먹이를 찾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바라보면서 1시간 만에 이곳 킬링필드에 도착했다.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크메르 루즈(크메르 공산당)의 통치기간(1975~1979)이던 39개월간에 자행되었던 것으로, 이 때 많은 크메르인들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킬링필드는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캄보디아 전국에 걸쳐 68개소의 유골 탑이 있다고 한다.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였던 폴 포트는 부패한 정부를 깨끗하게 바꾸어 살기 좋은 캄보디아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그는 살인자란 별명을 얻었고, 킬링필드라는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때 일어난 일은 거의 무정부상태라고 할 정도였고, 캄보디아의 발전을 뒤로 돌린 사건이었다. 심지어 지금 캄보디아의 50대 이상 인구가  현저히 적다고 한다.

 

 이곳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킬링필드의 유골 탑으로, 8층 높이의 탑에 남녀 및 연령별로 구분해 8,985명이 안치되어 있었다. 일행은 안내자(여행사 사장)를 따라 설명을 들으며 킬링필드를 한 바퀴 돌았다. 먼저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은 다음 트럭에 실려 이곳에 와서 선(트럭 스톱)곳을 시작으로, 어둡고 컴컴한 유치장, 사형집행자의 사무실, 화학물질 저장실, 살인도구 보관소를 보았다. 지금은 안내판만 있을 뿐 실물은 없었다.

 


<프놈펜 가까이에 있는 킬링필드 정문>

 

<8,985명의 유골이 안치된 프놈펜 가까이에 있는 유골 탑>

 

<크메르 루즈 지배 당시 트럭을 정지시켰던 곳의 안내판>

 

<어둡고 컴컴한 유치장이 있었던 곳의 안내판>

  

 이어서 450명이 한 구덩이에 묻혔던 구덩이, 머리가 깨진 166명의 피해자 무덤, 어린아이의 머리를 나무에 쳐서 죽인 나무, 과반수가 나체인 어린이와 여자들 100명이상의 무덤, 1980년 발굴된 후에 남은 뼈 조각 등을 돌아보았다. 끝으로 유골 탑의 내부를 보았는데, 사람이 이 정도로 잔인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1980년 발굴 당시 450명이 묻혔던 구덩이 안내판>

 

<1980년 발굴 당시 머리가 깨진 166명의 피해자 무덤 안내판>

 

<어린아이의 머리를 쳐서 죽인 나무(Killing Tree)의 안내판>

 

<과반수가 나체인 어린이와 여자들 100명 이상의 무덤 안내판>

 

<1980년 발굴 당시 희생자들의 옷 등의 조각들>

 

<1980년 발굴 당시 희생자들의 남은 뼈조각들>

 

<1980년 발굴 당시 현장 사진을 전시한 안내판>

 


<킬링필드 유골 탑에 안치한 유골들 1>

 

 

 일행은 정문 옆에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고문도구, 1980년 발굴현장 사진, 피해자 사진,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은 몇 사람 중의 하나인 화가가 당시의 상황을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전시물 중에는 데이빗 리오이 스콧(David Lioy Scott)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인(Australian)도 있었다.

 

<킬링필드구역 안에 있는 작은 박물관>

 

<킬링필드 안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고문 도구들 1>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1980년당시 발굴현장 사진 1>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1980년당시 발굴현장 사진 2>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전 정보차관과 그의 가족 사진>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피해자 중 외국인인 오스트렐리아의 스콧 사진>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살아남은 몇 사람 중의 하나인 화가가 그린 그림 2>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살아남은 몇 사람 중의 하나인 화가가 그린 그림 3>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살아남은 몇 사람 중의 하나인 화가 사진> 

 일행은 킬링필드를 보고나서, 전에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며 유유히 흐르는 강을 지나 뚜얼슬랭박물관으로 갔다. 한때 고등학교였었지만, 뚜얼슬랭은 폴 포트 통치기간동안의 형무소로 온갖 고문이 자행된 곳이었다. 그들은 주로 전에 경찰과 장교인 군인 및 공직자 등과 그들의 가족을 붙들어와 이곳 형무소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킬링필드에서 죽였던 것이었다.

 

 

<한 때 고등하교였던 뚜얼슬랭박물관(형무소)>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후 형무소이던 이곳을 정비해 박물관으로 만들어, 킬링필드와 함께 이곳을 찾는 모든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크메르의 아픈 상처를 전 세계에 알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세상에서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곳은 2층 건물로 건물이 서로 붙지는 않았지만, 기역자()와 비슷한 구조였다. 건물을 둘러싸고 높은 담이 쳐진 위에 철조망을 촘촘하게 쳐서 구금자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정원에는 철봉 같은 것을 세워 놓고, 피해자를 매달아 물고문을 했던 곳이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옆에는 커다란 물통들이 있었다. 또한 그릇에 물을 담아놓고, 머리를 집어넣게 하는 물고문도 있었다.

 

<뚜얼슬랭박물관(형무소) 외부 담장 위에 친 철조망>

 

<크메르 루즈 지배 당시 이곳에서 물고문했던 도구들>

 


 매표소에서 들어가 세로로 있는 첫 건물은 독방이었다. 독방은 철제 침대와 양 발목을 묶는 장치 및 취조하는 조그만 책상이 있었다. 2층에는 당시 폴 포트의 사진, 이곳을 운영하면서 회의 및 고문하는 장면의 사진, 화가인 보멍씨가 그린 폴 포트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뚜얼슬랭박물관(형무소) 독방 모습>

 

<뚜얼슬랭박물관에 전시된 고문 받는 그림>

 

<독방 2층에 전시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화가(보멍)가 그린 폴포트 초상화>

 

 가로로 있는 건물은 여러 명의 피해자들이 함께 있으면서 고문을 받던 곳이었다. 이 건물 벽에도 철조망을 쳐 감시했으며,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정보차관 부인과 아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은 죽음을 예견했는지 담담한 표정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혹시 전에 차관을 지낸 부인은 크메르 루즈가 볼 때 잘못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아들은 아직 젖먹이로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며 죽어야만 했을까.

 

<형무소로 사용하던 당시, 건물 유리창 뒤에 친 철조망>

 


<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화가가 그린 합동 숙소 모습>

 

 

 여기에도 당시의 숙소, 고문 하는 장면, 유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곳에는 유골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고, 메콩()과 똔레쌉강을 붉게 그려 핏빛으로 보이게 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당시의 상황을 무언으로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뚜얼슬랭박물관에 전시된 고문 도구들 1>

 

<뚜얼슬랭박물관에 전시된 고문 도구들 2>

 

<뚜얼슬랭박물관에 전시된 유골로 그린 캄보디아 지도>

 

<뚜얼슬랭박물관에 전시된 유골들>

 

<뚜얼슬랭박물관에 전시된 캄보디아 킬링필드 지도>

 

 독방이 있는 건물의 지하에는 작은 벽돌 방에 갇힌 독방 수감자의 사진과 고문장면의 그림 등이 있었다. 그러나 건물 밖의 정원에는 불상을 세우고 나무와 꽃을 가꾸고 있어,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불상은 이곳에서 고문 받다 킬링필드에서 천국으로 간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것일까.

 

<박물관 지하 독방에 있는 피해자 사진>

 

<박물관 앞 정원에 기도하는 불상>

 

 형무소였던 박물관을 모두 돌아본 일행은 버스를 타고 호텔로 갔다(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