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베트남 일주

훼의 카이딘 황제 능과 호이안 구 시가지를 돌아보며

boriburuuu 2016. 3. 6. 00:54

 

 응우엔 왕조의 12대 황제(1916~1925재위)인 카이딘 황제가 묻힌 곳으로 응릉(應陵)이라고 하는데, 다른 황제 능에 비해 파격적인 건축양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친 프랑스정책을 유지했던 황제답게 동서양의 양식을 융합해 무덤을 건설했다. 목조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를 사용해 만들었으며 고딕양식, 바로크 양식, 중국(청나라)양식, 힌두사원 양식이 혼재해 있었다. 건축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랑스, 중국, 일본 등에서 건축자재를 수입해 왔다고 한다.

 

 카이딘 황제 능은 뜨득 황제 능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산기슭에 건설했기 때문에 구조가 독특했다. 모두 127개 계단을 이용해 층을 높여가며 무덤을 만들었다. 매표소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보니 패방이 눈에 들어왔다. 용 조각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데,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어 독특했다. 패방 안쪽에는 능을 지키는 문관, 무관, , 코끼리 등의 석상이 두 줄로 연속해 있었다.

 

<카이딘 황제 능을 오르는 1단 계단>

 

<카이딘 황제 능을 오르는 2단 계단과 콘크리트로 만든 패방>

 

<카이딘 황제 공덕비 앞에 있는 코끼리, 말 및 베트남민 콘크리트상>

 

<카이딘 황제 공덕비 앞에 있는 문인상을 배경으로>

 

<카이딘 황제 공덕비 앞에 있는 베트남 민중상 사이에 서서>

 

 카이딘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공덕비는 콘크리트로 만든 82층 건물 안에 있었다. 계단을 더 오르니, 황제의 묘역에 해당하는 천정궁(淺定宮)이 있었다. 용이 조각된 계단과 사원모양의 외관은 다분히 동양적이지만, 외벽은 섬세한 로코코 양식으로 우아하게 장식했다.

 

<두 번째 계단 위에 있는 카이딘 황제의 공덕비>

 

<카이딘 황제 능으로 오르는 3단 계단과 천정궁(淺定宮) 로코코 양식의 외벽>

 

<용이 조각된 계단과 한문으로 쓴 주렴>

 

 묘역 안으로 들어서니 화려함의 극치였다. 형형색색의 도자기와 유리를 이용한 모자이크 공예로 내부를 꾸몄다. 바닥은 꽃으로 장식했고, 천장은 9마리의 용이 구름을 휘감고 있었다. 카이딘 황제의 시신을 안치한 방은 계성전(啓成殿)인데, 대좌에 앉아 있는 카이딘 황제의 청동 동상을 세워 실제 궁전처럼 꾸민 것이 이채로웠다.

 

<천정궁 안에 있는 계성전(啓成殿) 모습>

 

<모자이크가 아름답게 장식된 무덤 옆에 앉아 있는 카이딘 황제 청동 동상>

 

<계성전의 카이딘 황제 청동 동상을 배경으로>

 

<도자기와 유리로 아름답게 모자이크한 기둥 중간에 있는 한문 글씨>

 

 옆방은 카이딘 황제의 재위시절 각국에서 받은 선물들과 직접 사용하던 칼 및 카이딘 황제의 집무하는 모습의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하고 내려오면서 보았는데, 공적비가 있는 북쪽의 작은 방에는 황제의 장례식 장면 등의 흑백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카이딘 황제 무덤 옆방에 전시된 물건 1>

 

<카이딘 황제 무덤 옆방에 전시된 물건 2>

 

<카이딘 황제 무덤 옆방에 전시된 물건(칼) 3>

 

 

<카이딘 황제가 집무하는 모습의 사진을 배경으로 2>

 

 

<카이딘 황제 능에서 내려다 본 풍경>

 

<카이딘 황제 능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일행 모습>

 

 일행은 훼 시내로 나와 서울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오랜만에 상추쌈과 돼지고기 등이 나오자 맛있게 먹었다. 점심 후, 버스에 올라 호이안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휴식을 취했는데, 이곳은 돌로 직접 조각품을 깎고 있었다. 또한 가게와 정원에는 제작한 각종 작품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진열해 놓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점심을 먹은 서울식당 간판>

 


<호이안으로 가는 휴게소에서 돌을 깎아 조각을 만드는 모습 1>

 

<호이안으로 가는 휴게소에서 돌을 깎아 조각을 만드는 모습 2>

 

<휴게소에 엄청나게 많이 쌓아 논 조각들 1>

 

<휴게소에 엄청나게 많이 쌓아 논 조각들 2>

 

<휴게소에 엄청나게 많이 쌓아 논 조각들 3>

 


 훼에서 호이안까지는 2시간4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호이안에 도착한 일행은 광장에 주차한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오늘의 숙소인 리버사이드 리조트는 투본강 건너에 있는데, 큰 차가 다리를 건널 수 없어 미니버스를 기다렸다. 사전에 연락 했을 것임에도, 리조트의 차만으로 일행과 짐을 모두 옮기려니 여러 번 다녀야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미니버스에 올라 일행이 와있는 숙소로 갔다. 숙소의 전망은 아주 좋았다. 껌난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강변에 붙어 있었다. 방을 정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호이안 구 시가지를 구경하러 9명이 나섰다. 투본강이 큰데 비하여 껌난교는 생각보다 좁았다. 차도에는 작은 차들만이 다니는데, 2대가 교차하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오토바이와는 쉽게 교차할 수 있었다. 인도도 너무 좁아 걸어가기 불편했다.

 

 우리는 재래시장인 호이안시장을 지나 하이난회관(海南會館)으로 갔다. 출입문 현판은 해남회관이 아니라, 경부회관(瓊府會館)이라고 쓰여 있었다. 호이안이 중국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향우회관(鄕友會館)이었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해상무역을 하던 중국 상인들이 호이안에 정착하여 고향사람들끼리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향우회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회관은 중국 하이난성 사람들이 1875년에 건설한 것으로 고향출신 화교들의 친목도모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본당인 소응전(昭應殿)에는 항해도중 사망한 108명의 하이난 상인을 추모하는 제단이 있었다. 1851년에 일어난 참사로 상인들이 타고 가던 3척의 배가 뜨득 황제 시절에 베트남 해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고에 대한 애도의 의미로 뜨득 황제가 사망한 상인들을 성인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 호이안 구 시가지 해남회관 입구에 있는 경부회관(瓊府會館)이란 현판>

 

<해남회관 안에 있는 소응전>

 

<해남회관 소응전 내부 모습 1>

 

<해남회관 소응전 내부 모습 2>

 

<해남회관 소응전 내부 모습 3>

 

 우리는 소응전 등을 자세히 돌아보고, 푸젠회관(福建會館)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회관은 1690년에 건설한 것으로 호이안에 있는 회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명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푸젠성 화교들이 친목도모를 위해 건설했다. 회관 출입문은 패방에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이며 복건회관이란 현판이 달려 있었다.

 

 패방 안쪽에는 3개의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출입문이 있었다. 2층 규모로 상단에는 금산사(金山寺)란 현판이, 하단에는 복건회관이란 현판이 쓰여 있었다. 회관 안뜰은 화분과 화석을 이용해 정원을 가꾸었고, 다양한 색깔의 도자기 파편으로 용, 봉황, 물고기, 거북이를 조각해 장식했다. 그 안에는 천후궁(天后宮)이 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호이안 구 시가지에 있는 "복건회관(福建會館)" 현판

 

<회관의 두 번째 출입문에 쓴 현판(위에는 금산사, 아래는 복건회관)>

 


 이어서 우리는 구 시가지를 거닐다 떤끼고가(進記古家)에 들렸으나, 통합입장권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 걸어가다 보니 투본강을 건너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그것을 배경으로 여러 사람이 추억을 남겼다.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다리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다.

 

<호이안 구 시가지에 있는 물고기 조각이 있는 다리>

 

 

 커브를 돌자, 바로 내원교(來遠橋)였다. 18m길이의 작은 다리지만, 호이안을 상징하는 랜드 마크였다. 일본상인들이 1593년에 건설한 것으로, 돌다리 위에 나무기둥과 기와지붕을 얹어 일본풍으로 만들었다. 이 다리는 당시 오른쪽에는 중국 상인들이 거주했고, 왼쪽은 일본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리 중간에 있는 작은 사원은 도교사원으로 날씨를 관장하는 신인 박데(北帝)를 모시고 있었다.

 

<호이안 구 시가지의 랜드 마크인 내원교 야경>

 

<내원교 내부의 현판>

 

<내원교 내부의 도교사원>

 

 우리는 투본강의 야경을 구경하며 구 시가지를 걸어서 내려오다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재래시장 부근에 값이 싸면서도 서민이 많이 먹는 음식이 있을 것으로 믿고 들어갔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우리는 울타리 안에 식탁을 놓은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서양 관광객이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쌀국수와 맥주를 시켜서, 가지고 간 소주와 같이 먹고 마셨다. 배가 부르면 만사가 좋아지는 것인가. 우리는 기분 좋게 재래시장을 지나고 껌난교를 건너서 리조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