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베트남 일주

훼의 뜨득 황제 능을 돌아보며

boriburuuu 2016. 3. 6. 00:46


오늘은 일찍 체크아웃하고, 프런트에서 추억을 남기고 호텔을 출발(07:40)했다. 훼 시내를 지나 흐엉강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목적지인 뜨득 황제 능이 나타났다.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황제 능 앞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 여러가지 물건을 보았다. 능으로 들어가자, 안내자는 정문 앞에서 뜨득 황제 능을 개별적으로 돌아보고 이자리에 다시 모이라고 했다.

 

<훼의 로맨스 호텔 프런트에서 추억을 남기고 1>

 

<뜨득 황제 능 앞 가게 풍경 1>

 

<뜨득 황제 능 앞 가게 풍경 2>

 

<뜨득 황제 능 앞 가게 풍경 3>

 

<뜨득 황제 능 앞 가게 풍경 4>

 

<뜨득 황제 능 앞 가게 풍경 5>

 

<뜨득 황제 능 앞 가게 풍경 6>

 


<뜨득 황제 능 앞 가게를 배경으로 2>

 


<뜨득 황제 능 앞 가에서 물건을 살펴보는 일행 모습>

 

 응우엔 왕조의 황제 능은 왕궁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13명의 황제 중에 7명만 능을 건설했다. 나머지는 프랑스 식민지배에 반대해 폐위되었거나, 망명길에 올랐던 비운의 황제들이다.

 

 이곳은 응우엔 왕조의 4대 황제인 뜨득 황제(1847~1883재위)가 묻힌 곳으로 겸릉(謙陵)이라고 했다. 황제들이 살아생전에 자신의 묘 자리를 정하고, 무덤을 건설하는 것이 응우엔 왕조의 관례였다. 하지만 뜨득 황제는 무덤이 완성되고도 16년을 더 살았다. 응우엔 왕조의 황제들 중에 가장 오랜 기간인 36년간 통치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완성된 무덤을 미리 찾아 뱃놀이를 즐기거나, 시를 쓰면서 여가를 보냈다. 물론 왕비들을 대동하고 궁중연회를 펼치기도 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는데, 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덤에 왕실극장까지 만들어 마치 황제의 별장처럼 사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뜨득 황제의 삶이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장남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형제간에 권력다툼을 벌려야 했고, 응우엔 왕조에 반기를 든 쿠데타도 여러 차례 진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황제를 슬프게 했던 것은 왕위를 이을 후손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려 104명의 왕비를 거느렸으나 후사를 보지 못하고, 사촌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해 왕권을 물려줘야 했다.

 

 무덤은 기존의 황제 능 건축양식을 파괴해 인공연못을 전면에 배치하고, 호수 옆에 황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설했다. 뜨득 황제 능은 겸릉이라고 하였는데, 엄청 크고 넓으며 호사스러운 무덤의 규모와 달리 겸손하다는 의미로 능 내부의 모든 건물과 호수는 ()”자를 사용해 이름을 지었다.

 

 뜨득 황제 능은 남동쪽 출입문인 무겸문(務謙門)을 통해 들어갔다. 묘역에 들어서니 인공호수인 유겸호(流謙湖)가 넓게 펼쳐졌고, 호수 가장자리에는 충겸사(沖謙榭)와 유겸사(愈謙榭)란 정자가 있었다. 유겸사 위로 3단으로 된 계단을 올라 사당 출입문인 겸궁문(謙宮門)을 들어서니, 궁전처럼 생긴 화겸전(和謙殿)이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황제가 생전에 무덤을 찾았을 때 집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뜨득 황제 능(겸릉,謙陵)의 정문인 무겸문(務謙門)>

 

<인공호수인 유겸호(流謙湖) 풍경>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유겸사(愈謙謝) 원경>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유겸사 현판>

 

<호수 가장자리에 왼쪽에 있는 충겸사(沖謙謝), 중앙에 있는 것은 유겸사>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충겸사에서 취고 있는 민속공연팀>

<뜨득 황제의 위패를 모신 화겸전으로 들어가는 겸궁문(謙宮門) 전경>

 

<겸릉 안의 다양한 건물들>

 

<뜨득 황제의 위패를 모신 화겸전(和謙殿) 전경>

 

<뜨득 황제의 위패를 모신 화겸전 내부와 현판>

 

<화겸전에 모신 뜨득 황제 위패>

 

 내부에는 황제가 행차하던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또한 황제가 앉았던 의자, 가마 등이 있고, 뒤쪽에는 황제의 침전으로 사용하였던 양겸전(良謙殿)이 있었다. 지금은 황제와 황후가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을 빌려주며 관광객에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화겸전에 전시된 뜨득 황제가 앉았던 용상>

 

<화겸전에 전시된 황제가 타고 다니던 가마>

 

<화겸전 내에 황제의 침실이던 양겸전(良謙殿) 현판>

 

<화겸전 내부에 모신 가족들의 위패>

 

<화겸전 황제의 용상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는 일행 1>

 

 

<화겸전 뒤쪽에 무너질 것 같은 건물 모습>

 

<뜨득 황제 능에 있는 건물 중 원상복구하는 모습>

 

 뜨득 황제의 무덤이 있는 곳은 인공호수를 끼고 북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일렬로 세운 문관과 무관 석상과 말의 키가 작은 것은 뜨득 황제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란다. 석상 뒤에는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공덕비가 있었다. 후임 황제가 전임 황제의 공적을 기록한 것과 달리, 뜨득 황제는 자신의 공덕비를 직접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업적만 기록하지 않고, 재위기간 중에 있었던 불행과 실수, 질병에 대해서도 기록했다고 한다. 또 다른 진기록은 공덕비의 크기인데, 베트남에서 가장 큰 것으로 무게가 무려 200톤이라고 한다. 공덕비 뒤에 있는 반원형의 작은 연못인 소겸지(小謙池)를 지나니 성벽으로 둘러싸인 무덤이 있었다.

 

<뜨득 황제의 키가 작아서 무덤 앞 말 석상도 여자들 키와 같은 모습>

 

<뜨득 황제의 키가 작아서 무덤 앞 문무관 석상도 여자들보다 작은 모습>

 

<베트남에서 가장 큰 뜨득 황제의 공덕비 전경>

 

<베트남에서 가장 큰 뜨득 황제의 공덕비 근경>

 

<황제 공덕비와 무덤 사이에 있는 반원형 소겸지(小謙池) 풍경>

 

<겸릉에 있는 뜨득 황제 무덤 전경>

 

<성벽으로 둘러싸인 뜨득 황제 무덤 모습>

 

<뜨득 황제 무덤을 보고 내려가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

 

 황제 무덤 동쪽에도 구조물이 있어 가봤더니 무덤이 있었다. 무덤은 사방으로 성벽을 둘러싼 것으로 보아 황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유겸호에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은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행은 정문 앞에서 모여, 다음 목적지인 카이딘 황제 능으로 향했다.

 

<뜨득 황제 능 동쪽에 있는 또 다른 무덤 앞 모습>

 

<뜨득 황제 능 동쪽에 있는 또 다른 무덤 모습>

 

<뜨득 황제 능 동쪽에 있는 또 다른 무덤 앞 사당 모습>

 

<유겸호에서 황제 능 동쪽에 있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의 복구작업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