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주인이 택시운전수를 소개해주어 벨기에 청년과 함께 이른 아침을 먹고 택시에 올랐다. 페트라가 있는 와디무사에 가는 제트버스는 아침 6시 반에 단한번 운행된다.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맨 뒤 좌석을 받았다. 하마트면 티켓을 못 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택시운전수는 5디나르를 달라고 했지만 매정하게 3디나르만 주어 돌려보냈다. 어제 훨씬 먼 터미널도 1.75디나르였었는데 하면서. 제트버스는 10디나르로 3시간 반 걸려서 우릴 내려주었다. 돌아가는 버스는 원래 4시에 한차례 있는데 3시반으로 앞당겨졌다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우리나라 암만 유학생들이 많이 탔었는데. 우린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좀 외곽에 있긴 했지만 3성급인 이 호텔은 깨끗하고 시설도 괜찮은 편이었다. 페트라와 멀어 매번 택시비로 2디나르를 쓰긴 했지만 바로 앞의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바에는 택시를 타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와디무사 가는길>
<휴게소 내부>
드디어 페트라에 입성했다. 참, 이번에 요르단패스(페트라 2일권)는 정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햇다. 제라쉬도 10디나르 인데 무료 입장이었고 비자비 40디나르도 외디럼 입장료까지 면제였다. 요르단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다. 입장을 하면 오른쪽엔 사람이 왼쪽엔 말과 낙타가 가는길이 쭉 이어진다. 입장료에 낙타나 말을 타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 탈 수 있지만 팁을 많이 요구하므로 가격은 비싸다.
제일 먼저 진 블록이 나타났다. 육면체의 큰 바위 덩어리 3개다 진 블록이라 하는데 밑에 조그만 파이프 구멍이 있고 무덤 방이다. 2m*2.2m*1,2m의 크기인데 시리아 팔미라 지방의 일반적인 장례비석이라 한다. 사자의 이름, 생전의 업적, 추모의 글 등을 써 놓는단다.
다음은 오벨리스크 능묘이다. 바위산을 깎아만든 건축물로 2층인데 위층은 오벨리스크 4개가 서 있고 아래는 마모된 트리쿨리아눔 무덤이어 상관관계는 없고 세월이 흐른 뒤 2층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하나씩 있고 중앙에 홀이 있으며 바위를 깎아 만든 3개짜리 좌석의 돌 의자 같은 횡와식탁(트리클리아눔)이 있다. 상층은 올라갈 수 없고 오벨리스크 4개를 튀어나오게 부조시키고 사이에 닛치와 출입구를 두었는데 죽은자의 비석에 해당된다. 우린 올라가 보았는데 계단도 자연석을 그대로 파서 만든 것이었고 지하에도 방이 있었다.
<2층의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 안쪽 조각>
<무덤 내부>
<돌 계단>
<처음이라 이런 바위도 신기했다.>
페트라에는 8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는데 우린 하나하나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먼저 가장 앞에 있는 8코스를 걷기로 했는데 안내원이 없으면 갈 수 없고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린 시도해 보기로 하고 길을 찾아 올라갔는데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신기한 장면이 펼쳐졌다. 붉은 바위, 하얀바위를 비롯해 가우디의 산을 모티브로한 건물 까사밀라와 거의 흡사한 큰 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치 가우디가 여길 보고 가서 그 건물을 설계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페트라 전체 지도>
<8트레킹 코스 지도>
<하얀 바위 위에서>
<까사밀라를 연상케하는 바위산-실제로보면 더 그렇다>
<붉은 바위군>
<하얀 자갈이 바위에 박혀 있다>
트레킹을 마치고 시크협곡으로 접어 들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마른 연못과 협곡 입구 산 밑의 터널이 있다. 폭우를 대비해 협곡 입구에 둑을 건설해 호수를 만들고 배수할 수 있게 산 밑에 터널을 만들엇다. 이 터널은 알 굽타 산 밑을 80m 정도 지나 무즐림과 연결되어 잇다. 바위산 둘이 5-10m 사이를 두고 기대면서 높이 100m, 길이 1.5킬로의 자연협곡을 만들었는데 바위 아래에 판 홈은 도수도다. 댐으로 만들어진 호수 물을 시내로 연결하는 수로관인 셈이다. 수로관 위의 벽에 조각된 것은 닛치를 파서 얕은 기단 위에 조각한 나바테아 최고신 두쉬라트 신상(그리스로 치면 제우스?)이다. 협곡 중간에 길가 육면체의 작은 방위는 알-우자 신상(그리스로 치면 비너스?)을 모신 사당이다. 바위 표면의 조각은 나바테아 건축양식이 다 들어 있는데 주두가 있는 기둥이 양쪽에 섰고 그 사이 아치문과 방을 굴착했고 1m 정도의 알-우자 여신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아치문 위에 줄무늬와 그 사이 둥근 꽃잎을 돋을 새김으로 조각했다.
<시크 협곡>
<협곡의 도수도>
<두쉬라트 신상>
<듀사라트신상>
<낙타와 상인>
<발이되어주는 당나귀들>
협곡 끝에 드디어 세계 7대 불가사의인 페트라의 보물 알 카즈네가 있다. 정면 꼭대기에 항아리가 있어 아랍 말로 ‘보물창고’인 알 카즈네로 불린다. 배드윈들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마법을 부려 진귀한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전설을 믿고 항아리에 총을 쏘거나 외지인들로부터 보물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단다. 조그만 안뜰에 사방이 똑바로 선 절벽인데 돌 산 벽 하나를 택해 집 와관을 조각하고 아래 층에 석굴을 파서 넓은 홀과 부속실을 조성했다. 이집트 아부심벨의 영향을 받았다. 산을 깎은 것은 이집트의 영향을, 주두 장식이나 인물 조각상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방이나 큰 보의 장식조각에 삼각 박공을 새긴 것은 나바테인 특유의 것이다. 알 카즈네는 붉은 장미색 바위를 높이 40m, 너비 28m 폭 5m 정도의 깊이로 파서 2층 건물을 조각한 것이다. 2층은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통과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원기둥 4개가 왕관 같은 고깔기둥을 받치고 있다. 고깔 지붕 위에 보물을 넣었다는 항아리가 올라 앉았다. 이것은 훗날 이슬람 건축의 돔이나 미나렛의 꼭대기에 피니알로 전승되었다. 고깔 지붕 아래의 장식이 현란한데 서까레는 우리나라 기와 막새와 유사하고 수평보는 로마식, 그 아래엔 꽃잎 부조다. 기둥의 코린트식 주두 장식은 나뭇잎 부조다. 이들은 2000년 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윤곽이 뚜렷하다. 기둥들 가운데 원통벽의 아름다운 여신상의 양각이 있는데 왼쪽 팔에 풍요와 행운을 상징하는 뿔 나팔을 안고 있다. 이는 그리스의 행운의 여신 티케다. 여신상 발아래 기단에는 염소 불 사이로 태양 원반을 조각한 문장을 새겼는데 이는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상징해 한 손에 풍요의 뿔을 한 손에는 행운의 나뭇잎을 들고 있다. 이 여신은 그리스의 아프로디테로 프롤레마이오스 시대 화분이나 질그릇 표면에 자주 등장하는 베르니케 왕비로 페트라에서는 최고의 여신 알 우자로 변모했다. 그리고 별관은 삼각박공 지붕을 반으로 잘라서 고깔지붕 양 쪽에 대칭되게 세웠다. 삼각 박공지붕을 3개의 원기둥과 벽체로 받치고 있는데 꼭대기에 독수리를, 지붕 끝에 스핑크스를 비롯한 신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독수리는 주신인 듀사라트신을 상징한다. 별관도 여신상을 조각했는데 도끼 춤을 추는 아마존 여 전사다. 층보에도 나바테아 전통 문양인 삼각박공을 조각했고 꼭대기에 황소 뿔과 태양 원반을 조각해 올려놓았고 박공지붕 끝에 그리핀과 여러 나뭇잎들을 부조했다. 그리핀은 사자 몸체에 독수리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인데 뒷발과 꼬리를 포함해 하체는 사자 모양이고 날개, 앞발, 머리는 독수리 모양이고 메두사 머리도 있다. 아래층은 6개 원기둥이 2층 6개 기둥과 줄을 맞추었다. 양쪽 끝 두 원기둥 사이는 벽인데 인물상을 부조해 놓았고 말을 끌고 누구를 인도하는 형상이어서 그리스신화의 디오스쿠리와 흡사하다. 쌍둥이 카스트로와 풀룩스가 사자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신상들이나 나뭇잎 장식등을 보면 신전이고 이시스 여신, 스핑크스, 항아리 등을 보면 장제전인데 일단 최고신인 두쉬라트 신전일 것이다. 용도는 정확하지 않다. 19세기 중엽 영국화가 데이비드 로버트의 그림에는 아래 기둥 왼쪽 세 번째의 기둥이 잘려 있는데 보수를 했으나 돌의 종류 등 아쉬운 보수가 되었다. 홀과 방은 아잔타나 아부심벨에 뒤지지 않는데 특히 바위 색상이 압권이다. 붉은 장미색을 띠는데 처음 들어서면 양 쪽에 큰 방이 있는 홀이 있고 문틀위에 나바테인들의 전통 장식이 되어 있고 그 위에 환기 구멍을 뚫었다. 계단을 올라서야 주실인데 문 인방에 전통문양인 화려한 사각 왕관을 새겼고 방은 반듯하게 육면체로 굴착햇는데 세 개의 사각문 밖에 없는 빈 방이다. 사각문 안은 묘실로 보인다. 왕의 묘원일 가능성이 높다. 아테라스 3세나 4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건물은 헬레니즘 양식이 나바테아 건축에 깊이 혼합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현재 내부는 들어갈 수 없어서 모두들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었다.
<알 카즈네>
<장미처럼 보이는 바위무늬>
<맨 오른 쪽의 보수한 기둥>
<말을 타고 가는 부조>
<앞에 손님 맞이 낙타>
<요금포함이라며 말타기를 권유하나 고액의 팁을 요구함>
<실크 묘원 앞에서>
<내부의 돌 무늬>
알카즈네를 나와 골목 모퉁이를 지나면 넓은 벌판이 나오는데 바위 평야다. 거기에 산을 깎아 만든 무덤들이 도로를 따라 산비탈에 즐비하게 섰는데 4층 선물 상부에 총구멍이 한두줄 뚫려 있는 탑신과 비슷한 건물도 있고 윗부분을 두관 모양으로 조각한 건물도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양의 건물들을 전시한 것 같다고 해서 파사드 거리라 한다.
원형극장은 파사드 거리를 지나 왼쪽 신비탈을 깎아 만든 것인데 로마는 산비탈을 깎아 민들었지만 이곳은 마당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아테라스 4세(0-27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나 대지진으로 104년에 라벨왕이 363년 로마가 수리했다. 객석 무대를 중심으로 반원인데 반경이 50m나 되고 암갈색 바위로 만들었으며 분장실 기둥과 기단 등으로 볼 때 건물 하체는 페트라산 석재로 되었을 것이고 지붕과 천정은 목재로 구성되어 마감이 화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입구가 산중턱에 있었는데 아마도 그 당시에 바닥은 호수여서 객석에서 호수가 보이도록 무대를 낮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바위가 있어서돌 하나로 원형극장을 만들었을지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대로 들어가는 출입구>
이제 우리는 파사드 거리의 묘원들을 보러간다. 원형 극장을 지나면 넓은 평원이 전개되는데 왼쪽에 도시 중심부가 오른쪽에 쿱타산이 솟아 있는데 쿱타 산 아래 묘원 5개가 한줄로 서 있다. 첫째가 항아리묘원, 실크묘원, 코린트묘원, 팔레스묘원이다. 먼저 항아리묘원은 경사진 붉은 돌산을 높이 60m, 폭15m, 깊이 7.5m로 묘원 전면을 조각했다. 묘원 입구의 마당은 인공적인 작은 터널 몇 개로 지하층을 이루며 마당을 받치고 있다. 전면은 높은 벽기둥 4개로 구성되었다. 기둥 위의 수평보엔 삼각박공 지붕을 새겼고 꼭지 위에 항아리를 조각했다. 두 개의 수평재 사이의 네 명의 여성 반신상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침식되었다. 출입문의 인방보 역시 삼각박공지붕을 부조했다. 묘원안은 가로세로 20m의 텅 빈 정방형 방에 아치 벽 3개와 장방형 벽감 2개가 있다. 천장과 벽의 돌결이 화려하고 환상적이다. 분향실 겸 간단한 연회장이었던 것 같다. 5세기경 비잔틴 시대에 제이슨 주교가 은거하면서 묘원 앞에 지하방 6개를 두어 성단과 예배당으로 사용했다고 그리스어로 낙서한 기록도 있다. 무슬림들이 테라스 지하 교회를 파괴했다.
<항아리묘원 앞 바위에서>
<항아리묘원 외관>
<항아리 묘원 내부>
실크묘원은 항아리묘원 옆에 있는 묘원으로 석산 표면을 별로 깊게 파지 않고 가능한 표면석으로 건물을 조각했다. 실크묘원은 다른 것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건물 표면에 실타래에 감아 놓은 울긋불긋한 색실같은 표면을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린 것 같은 돌결이다. 묘 구멍에 위층은 노랑, 파랑, 회색, 흰색이 섞여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고 출입구가 있는 아래층은 붉은 주황색 나무 껍질 문양이다.
<실크 묘원>
코린트묘원은 비교적 규모가 크고 고깔 지붕의 항아리는 알카즈네와 닮았다. 아래층은 표면석으로 얇게 조각했는데 비와 모래바람에 부식되어 디테일한 조각장식은 알아볼 수 없다.
<코린트 묘원>
<코린트 묘원에서>
팔레스묘원은 로마 궁전 건물과 흡사하게 생겨 로얄 묘 혹은 팔레스묘라 하고 3층 건물이라 층묘라고도 한다. 2,3층의 장식은 18개의 기둥을 일렬로 도열시켰는데 기둥 간격은 일정치 않으나 칸마다 사각 구멍을 두었다. 미완성 상태인데 1층은 전면 마감 장식이 상부층과 달라 다른 조각가에 의해 2,3층이 나중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층의 나바테아 전통 양식의벽기둥 5개 사이에 출입문 4개가 있는데 헬레니즘 궁전 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 묘원>
묘원들을 보고 우리는 비잔틴 교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아이들이 있어 언니가 가져온 츄파츕스를 주니 좋아한다. 눈망을이 어찌나 예쁘던지. 안쪽으로 5분쯤 걸으니 비잔틴 교회터가 나타났다. 역시 바닥의 모자이크화들이 눈네 띤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실수로 줄을 건드렸나보다. 금새 누군가가 나타났다. 얼른 미안하다고 하고 내부를 돌아보았다.
<바딕의 돌 모자이크>
<비잔틴의 코린트식 기둥>
<우물 터>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다가 3시 반이 넘으니 벌써 해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일을 기약하며 어제 안가본 아랫쪽 길을 걸어 나왔다.
<동굴 숙소들.현지인 거주지역으로 보임>
돌아나오다 카스 알 빈트사원을 만났다. 개선문 뒤 180m 떨어져 28m 정방형 규모에 높이 23m인 주황색 건물이 지붕 없이 서 있는데 석조가 아닌 건물이고 카스 알 빈트 파라온이라 하는데 ‘이집트 파라오의 딸이 사는 궁전’이란 뜻이다. 공주가 시집갈 나이가 되어 궁전에 수로를 먼저 건설한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완성해서 어떻게 빨리 완성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라 답하고 다른 사람은 신의 도움이라 답해 공주는 후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자 날개 달린 연약한 곤충이 날아들어와 첫째 후보자의 수로 물길을 막았다고 한다. 이 건물이 궁전이 아니라 신전이라는 신의 선택이었다. 1959-64년 피터 파르가 대리석 큰 손과 6m의 나바테아인 거상, 두쉬라트와 우자 신에게 봉헌했다는 비석까지 발굴했다. 그 뒤 여러차례 발굴단에 의해 아레타스 4세 때 두쉬라트와 우자를 모신 신전이었다가 106년 로마 점령시 로마 신들을 위한 신전이 되고 464년 지진으로 무너져 비잔틴 시대 공동묘지가 되었다. 무너진 기둥의 동그란 모양을 보니 얼마나 규모가 큰 곳이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개선문>
<무너진 기둥>
<바닥의 돌길>
<석양 빛의 파사드 묘원군>
다시 알 카즈네에 오니 그 많던 사람들이 얼추 나가서 다시 한번 보고 사진을 찍었다. 돌아나오는 시크 계곡은 석양의 황금빛을 받아 정말 아름다웠는데 다음날은 그런 빛이 나오질 않았다. 암튼 내일을 기약하며 우린 발길을 재촉했다. 수많은 바위들을 보면서 이제 그렇게 감탄할 일이 뭐 있겠나 생각했는데 페트라는 기대 이상이었다. 7대 불가사의는 아무거나 되진 않나보다. 밖으로 나오자 택시 기사가 호객을 한다. 3원을 달라고 하고 우리가 버스 정류장을 보고 가고 싶다고 하니 5디나르를 달란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다른 택시를 잡았다. 마음이 약한 언니는 그녀석들에게 잡혀 있었나보다. 2원에 똑같이 가주겠다며 기사들 사이에 충돌할 기미가 보였다. 다행히 얼른 수습이 되어 우린 숙소로 돌아왔다. 모레 와디럼으로 가야해서 투어도 알아봐야하고 교통편도 걱정이다. 우리에겐 무거운 짐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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