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시는 프랑스가 통치하던 코친차이나 시절부터 사이공으로 불리며 수도역할을 하며, “동양의 파리”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현재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지만, 경제와 교통의 중심은 호치민시다. 호치민시 중심에는 프랑스가 지은 콜로니얼 건축물이 가득해 유럽의 향기가 남아있고, 차이나타운을 이루는 쩌런은 전형적인 아시아 냄새를 풍기는 곳이다. 또한 여기에는 통일궁, 전쟁박물관 등 베트남의 현대사를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통일궁(Reunification Palace)”은 호치민시에서 가장 큰 볼거리로, 그 역사는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인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노로돔 궁전”으로 불렸으며, 1954년까지 프랑스 코친차이나 총독 관저로 사용됐다. 프랑스가 물러나고 베트남이 분단되면서, 1956년부터는 남부베트남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로 쓰이며 “대통령궁”이 되었다.
1962년 자국 공군 장교들에 의해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여 대통령궁 절반이 무너졌으나, 암살시도는 불발로 그쳤다. 그 후 1966년에 재건축되었으며,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궁은 베트남전쟁 막바지에 남부베트남 대통령이 수시로 교체되면서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궁은 1975년 4월 30일 10시 45분부터 ‘통일궁“이 되었다. 북부베트남군의 탱크가 철문을 밀고 들어오며 사이공이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북부베트남군은 대통령궁에 붉은 깃발을 계양하여 베트남이 사회주의로 통일되었음을 알렸다. 당시 통일궁 옥상의 헬리포트에서 마지막 미군 헬기가 철수하는 다급했던 상황이 외신을 타고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일행은 통일궁 앞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 들어가서, 통일궁을 나름대로 구경하기로 했다. 현재 주인 없는 건물로 남아있는 통일궁 오른쪽 나무그늘 아래에는 2대의 탱크가 있었는데, 당시 북부베트남군이 이곳을 무혈 입성한 탱크라고 했다.
<정문에서 바라 본 통일궁 전경>
<1875.4.30. 북부베트남군이 이곳으로 무혈입성한 탱크 2대>
통일궁의 본관은 지상 4층과 지하 벙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 회의실, 외국대사 접견실, 대통령 응접실, 대통령 침실, 식당, 영화관, 연회실 등 100여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1층 정중앙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은 주요 정책을 논의하고 국서를 결재하던 곳이었다. 마치 왕궁의 집무실처럼 나전칠기를 이용한 대형 벽화가 있어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통일궁의 국무회의실>
<통일궁 내부 모습 1>
<통일궁 내부 모습 2>
<통일궁 내부 모습 3>
<통일궁 내부 모습 4>
<대형 나전칠기 벽화가 있는 대통령 집무실>
<통일궁 복도의 전시물>
<통일궁의 대통령 침실>
<통일궁의 대통령 식탁>
4층에는 연회실이 있고, 옥상에는 헬리포트와 헬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통일궁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 방향으로 곧게 뻗은 도로는 베트남 통일 후 초대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레주언 거리”였다. 지하는 베트남전쟁 시 미군의 작전본부를 쓰였던 곳이었다. 또한 그 옆에는 주방이 있었고, 당시 남부베트남 대통령이 타고 다니던 승용차와 지프가 전시되어 있었다. 출구부근의 특별전시실에는 대통령궁이 함락되던 장면 등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일궁 4층 옥상 헬리포트에 전시된 헬기>
<통일궁에서 내다 본 정원의 분수와 레주언거리 풍경>
<통일궁 지하실의 식당 모습>
<지하 복도에 전시해 놓은 당시 대통령이 타던 자동차>
<1층에서 바라 본 통일궁 정원 풍경>
<1층에서 바라 본 분수가 있는 풍경>
이어서 일행은 전쟁박물관으로 갔다. 당초에는 이곳에 갈 계획이 없었으나 일행 몇 사람이 대장에게 건의해 가게 되었다. 박물관 앞 정원에는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다양한 전투기, 헬기 및 탱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호치민시의 전쟁박물관 전경>
<전쟁박물관 앞에 전시된 당시 사용하던 헬기와 탱크>
<전쟁박물관 앞에 전시된 당시 사용하던 전투기 등>
“전쟁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은 베트남 사람들이 바라본 베트남전쟁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을 전시한 곳이었다. 미국에 의해 자행된 전쟁이 어떻게 포장되었는지, 미국 영화를 통해 베트남전쟁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호치민시에서 딱 하나의 박물관을 봐야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전쟁박물관을 보면 좋다고 한다.
이 건물은 미국 정보부 건물로 쓰였던 곳으로,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에 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하기 전보다 1995년 수교 이후, 전시된 사진들의 내용이 상당히 순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한 메시지도 잊지 않고 전하고 있었다.
3층으로 된 건물에 들어선 박물관 전시실에는 주로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어떤 자료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사용했던 각종 총과 실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우리나라가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했었고, 나의 선배와 친지들이 직접 전쟁에 참가해서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군이 비엣공을 포로로 삼는 사진 1>
<미군이 비엣공을 포로로 삼는 사진 2>
<베트남전쟁에 사용되던 각종 실탄 1>
<베트남전쟁에 사용되던 각종 실탄 2>
<베트남전쟁에 사용되던 각종 무기들>
<베트남전쟁에 사용되던 각종 지뢰>
<베트남전쟁 당시 피해상황 1>
<베트남전쟁 당시 피해상황 2>
<호치민이 하노이의 반디광장에서 독립선언(1945.9.2)을 하는 모습>
<전쟁박물관을 관람하는 관광객 등 내부 모습>
한국군은 1962년 200명을 시작으로, 1968년 최고 50,000명이었고, 마지막 해인 1972년에 36,790명이 참전한 것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 파월장병들은 베트남 남부지방인 나짱 부근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며 백마, 맹호, 청룡부대가 차례로 주둔했던 그림이 있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을 상호 비교한 표도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군이 베트공(비엣공)을 포로로 잡은 사진은 상당히 순화된 것 같았다. 아마 이것은 그동안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우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베트남전쟁 시 각국의 파병현황 자료>
<각국 부대 주둔지 현황 자료>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비교 자료>
<한국군이 비엣공을 포로로 삼는 모습>
또한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발가벗은 여자아이가 울면서 거리로 뛰어가는 장면”의 사진은 전파를 타고 세계에 전파된 것으로, 후에 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이밖에도 헬기출동 등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외신 보도로 우리도 익히 본 종군작가 사진 1>
<외신 보도로 우리도 익히 본 종군작가 사진 2>
베트남전쟁의 참상과 고엽제 피해자를 보여주는 전시실을 볼 때, 우리의 상황이 그려졌다. 1~2년 동안 피해를 입은 참전용사들을 위해 우리나라도 그들에게 유공자로 대우해 주고 있는데, 10년간 전쟁을 한 베트남인들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특히 고엽제 후유증으로 몸이 붙은 쌍둥이와 팔이 한쪽 없는 여자아이의 사진을 볼 때,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하여 몸서리쳐지면서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끝났어도 고엽제 등의 피해로 몸이 붙은 쌍둥이>
<베트남전쟁은 끝났어도 고엽제 등의 피해로 팔이 한쪽 없는 여자아이>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노트르담 성당”으로 갔다. 이곳은 인민위원회청사, 오페라하우스, 중앙우체국과 더불어 호치민시를 대표하는 콜로니얼 건물이었다. 이것은 1883년에 완공된 것으로 붉은색 벽돌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었다. 2개의 58m 높이의 첨탑이 대칭을 이루며, 첨탑에는 6개의 동종이 걸려 있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건축 재료로 쓰인 붉은 벽돌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사르트르에서 수입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건물 외부만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호치민시의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1>
<호치민시의 노트르담 성당 내부 모습 1>
중앙우체국은 바로 성당 옆에 있었다. 그러나 나무에 걸려 전체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현재 근무 중이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건물은 아치형 출입문과 창문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을 취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벤탄시장에 들렸으나 별로 살 것이 없어 한 바퀴 돌아보는데 그쳤다.
<호치민시의 전형적인 고딕 양식인 중앙우체국 모습>
<중앙우체국 정문 위의 시계와 조각상>
<호치민시 중앙우체국을 내부>
숙소에 돌아와서는 룸메이트와 함께 “벤탄야시장”구경을 나섰다. 벤탄시장은 이미 문을 닫았으나 시장 밖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오늘 오후에는 시장 뒤에서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시계탑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시계탑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시계탑 앞 거리광장의 아름다운 야경도 즐겼다. “발이 고생해야 눈과 입이 즐겁다”는 말이 생각났다. 돌아오는 길에 반탄야시장을 둘러보았는데, 거의 먹 거리 판이었다. 우리는 어제 보았던 거리식당을 둘러보고, 마트에서 룸메이트가 맥주를 사가지고 와서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벤탄시장 앞 광장의 야경>
<벤탄시장 시계탑의 야경>
<호치민시의 밤거리 풍경 1>
<호치민시의 밤거리 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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