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터키(2014.07.27-08.14)

파타라유적지 등을 돌아보며

boriburuuu 2016. 3. 6. 17:17

 호텔을 출발(08:30)해서 40분 정도 지중해를 끼고 오다가 내륙으로 들어섰다. 바위산에는 소나무가 서 있고,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이 떠서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버스는 제법 큰 산을 넘어 정상부근에 있는 휴게소에 들어갔다. 옆에는 실크로드가 한창 번창할 때 사용했던 “리키야 한(Rikya Han)”이 아직까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실크로드시절 대상들의 숙소였던 "리키야 한" 을 휴게소에서 올려다 본 모습> 

<휴게소에서 내려다 본 "미라" 시가지 풍경> 

<미라로 가는 길에서 본 바위 위에 그린 터키 국기> 

휴게소 화장실은 무료였으나, 팁 박스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볼일만 보고 나오고, 거기에 돈을 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지인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돈을 내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터키는 우리나라와 달리 많은 화장실이 대부분 1리라(500원 상당)의 돈을 받고 있었다. 휴게소를 나온 버스는 일행을 카쉬에서 45Km떨어진 미라의 리키아 유적지인 석굴무덤과 원형극장 앞에 내려 주었다. 미라(Myra)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리키아의 중심 도시로 발 돋음 했다. 그 후, 비잔틴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 때 대주교청이 있는 리키아의 수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지금은 예전의 명성이 사라졌지만, 리키아식 석굴무덤과 성 니콜라우스교회는 오늘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었다. 일행은 먼저 원형극장 옆에 있는 석굴무덤을 찾았다.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경 고대 리키아 암벽무덤이 잘 남아 있는 곳이었다. 고대 리키아인들은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암벽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관을 안치했다. 이곳은 비가 많이 오지 않는 곳이라, 시신을 땅에 묻지 않아도 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 가까이 있을수록 더 빨리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정상 가까이에 무덤을 만들었다. 리키아의 무덤은 가옥식, 신전식, 기둥식, 석관식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바위 절벽에 조성된 미라의 공도묘지는 채색된 정교한 부조들로 장식되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탓에 형체를 겨우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절벽이 급경사이기도 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밖에서만 올려다보았다.

<바위산 절벽에 만든 "리키야 석굴무덤" 모습> 

<리키야 석굴무덤 근경> 

이어서 바로 옆에 있는 원형극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것은 141년 로마시대에 건설했으며,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었다. 직경 115m, 35열의 객석에 약 8,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검투사 복장을 한 현지인들이 사진을 찍게 하고 돈을 받고 있었다. 

<복원한 리키야 원형극장 전경> 

<복원한 리키야 원형극장 중간 부분 모습> 

<리키야 원형극장에서 검투사복장을 한 현지인과 사진을 찍기도 하고>

리키아 유적지를 출발한 일행은 시내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를 찾았다. 벌써 12시가 넘었기 때문에 일행은 끼리끼리 점심을 먹었다. 나는 일행 몇 명과 음식점에 들려 피데를 시켜 먹었다. 4명이 들어가서 양을 몰라 1개를 시켰는데 반죽을 해서 화덕에 직접 구운 피데는 정말 맛이 있어 다시 하나를 주문하니 '당연하지'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종업원 때문에 한참 웃었다. 종업원들은 음식도 조금 시킨 외국 관광객들에게 음식 만드는 장면 서빙하는 장면까지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다. 알리가 피데를 먹으라고 하더니 역시. 참 여기서는 무화과가 한창이어서 3킬로쯤 사서 점심으로 같이 먹었는데 날이 덥고 햇빛이 강해서인지 정말 달고 맛있었다. 한참 동안 우리의 주요 간식이 되었다. 이곳은 기독교에서 추앙받는 성 니콜라우스가 대주교로 봉직했던 곳이었다. 그는 파타라에서 태어서 알레산드리아에서 수학하고 미라의 주교로 임명 되었다. 그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성인으로 갖가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악독한 백정에게 살해당한 세 명의 아이들을 기도로 살려낸 것과 가난한 세 처녀의 결혼 지참금을 굴뚝으로 떨어뜨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아이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다는 것이 상상력을 더해 현대의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지금도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통해 선물을 준다고 어린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연유라고 한다. 이 교회는 3세기경 지어졌으며, 교회 내부에 성 니콜라우스의 석관이 있다. 그러나 1087년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석관을 깨고, 유골을 이탈리아로 가져가는 바람에 안은 비어 있다고 했다. 건물 밖에는 성 니콜라우스의 동상이 있었다. 시내에도 성 니콜라우스 기념품을 많이 팔고 있었다. 특히 이 성인은 러시아 정교회의 대표 성인이라 러시아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러시아어로 적힌 안내문도 있었다.

<성 니콜라우스교회에 있는 성 니콜라우스 동상> 

<성 니콜라우스교회 내부 모습> 

<성 니콜라우스교회 내부 벽에 그려진 성화>

<미라 상점가에 있는 성 니콜라우스상>

일행은 버스를 타고 파타라 유적지에 도착(15:30)했다. 파타라는 현재 인구1,000명 정도의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고대 리키아연맹의 수도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었다. 버스를 내린 일행은 먼저 알리의 안내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리키아연맹의 의회당인 오데온으로 갔다. 이곳에서 리키아연맹의 각 도시에서 파견된 의원들이 안건을 상정하고 의결한 곳이었다.

<완전 복원된 파타라유적지의 오데온 전경>

안으로 들어가니 급경사의 객석(1,400명 수용)이 있었으며, 단상도 있었다. 일행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일행 중 한 명인 음악선생님에게 여기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엉겁결에 불려나온 그는 한곳을 부르자 재창이 쏟아져 나왔다. 두 번째 곡을 부르고 난 뒤에, 나는 슬쩍 빠져서 옆에 있는 원형극장으로 갔다.  

<완전 복원된 파타라유적지의 오데온 내부 모습>

이 극장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곳으로 34열의 객석에 약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성악을 전공하신 사임지기님이 독창을하기도 하고 여성분이 사낭송을 하고 모두가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극장 뒷산에도 유적들이 있다고 했으나, 나는 오데온을 지나 이오니아식 원기둥이 줄지어 있는 중심도로로 갔다. 길옆에는 상점이었던 집터가 남아 있었다. 아마 당시에는 여기가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북적이는 곳이었으리라. 중심도로 끝에는 항구목욕탕이 있었고, 시작점에도 네로목욕탕 터가 있었다.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파타라유적지의 원형극장 전경>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파타라유적지의 원형극장 내부 모습> 

<파타라유적지의 중심거리 모습> 

<파타라유적지의 중심거리와 상가 터 모습> 

<파타라유적지의 항구목욕탕  모습> 

<파타라유적지 진입로 입구 오른쪽에 있는 네로목욕탕 모습>

나는 버스가 서있는 큰길을 나와 차로 온 길을 걸어갔다. 당시 만들은 길을 지금도 모든 차량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모두 돌을 깎아 포장한 도로였다. 조금 걸어가자, 비잔틴시대 리키아연맹의 중심교회인 “바실리카”가 있었다. 여기는 발굴 작업을 하려는 것인지 건물이 있던 자리에 줄을 쳐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파타라유적지인 개선문부터 만들어진 돌포장도로> 

<파타라유적지 개선문을 지나 오른쪽에 있는 바실리카교회> 

한참 걸어가자 커브 길이 있었는데, 그 왼쪽(개선문에서는 오른쪽) 넓은 터에 왕궁이 있었다. 지금은 발굴인지 복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중기를 들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개선문 쪽으로 올라가자, 8각형 연못이 나왔다. 

<파타라유적지의 개선문과 바실리카교회 사이에 있는 왕궁 모습> 

<파타라유적지 개선문을 앞에 있는 팔각형의 연못>

그 위에는 파타라유적의 상징인 개선문이 있었다. 높이 10m, 넓이 19m의 이 문은 도시로 들어가는 현관문으로 100년경 로마의 리키아 총독이 건립했다. 지하에 수도관과 방수구가 있어 단순한 문이 아니라, 도시의 용수 공급처 역할도 했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리키아식 석관이 있는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가 있었다. 

<파타라유적지의 상징인 개선문 모습> 

<파타라유적지인 개선문 옆에 있는 공동묘지의 석관> 

버스 있는 쪽을 쳐다보니 일행이 중심도로를 보고나서 버스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시간이 늦을 새라, 부지런히 걸어서 일행과 합류했다. 일행은 파타라 유적지를 출발(16:30)해서 오늘의 숙소인 페티예의 호텔에 도착(17:55)했다. 하지만 호텔이 작아 옆에 있는 호텔을 같이 쓰게 되었다. 

<개선문에서부터 걸어오면서 본 파타라유적지의 잔해들> 

<파타라유적지 도로 옆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는 양떼들> 

호텔 정문 쪽에는 강이 있고, 뒤편에는 해변에 붙어있어 경관은 매우 좋았다. 특히 배정 받은 방은 해변을 바라보고 있어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방에 실내화와 냉장고가 없어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페티예 호텔 뒤 강변의 풍경 2>

저녁을 먹을 식당은 호텔 지하층이었으나, 내려가 보니 해변과 붙은 지상 1층이었다. 바다의 파도는 약간 있었으나, 관광객들은 비치파라솔 밑에서 쉬기도 하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식사는 터키에서 처음으로 생선튀김이 있었으며, 물이 있어 좋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가하게 앉아서 식사를 파며 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패키지 여행 때는 꿈도 못꿀 일이니까. 밖으로 산책을 나가보니 한 식당에서 밸리댄스 공연을 하고 있어 한참 서서 관람했는데 전문 댄서의 춤이 매우 훌륭했다. 물에서 놀기 위해 준비물을 사기도 하고 우리 숙소의 식당에 앉아 해변의 일몰을 보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