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프랑스

제2일(5월 15일 2) 앙부아즈성, 투르

boriburuuu 2019. 6. 22. 14:06

블루아에서 앙부아즈성까지는 35킬로 정도 떨어져 있어 내비를 따라 가다보니 르와르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다. 강에서 하얗게 보이는 모습이 무얼까했는데 바닥의 돌이었다. 그래서 강의 물빛이 폴리드미체처럼 옥색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이 적어 유람선을 띄우기는 어려워 보였다. 앙부아즈성은 시가지 한가운데 있었다. 이 높은 성벽이 전에는 성채였음을 말해주는 이 성은 9세기부터 이지역 영주들이 살았던 성으로 1434년 샤를 7세가 루아 앙부와즈에게 성을 빼앗은 후 '앙부아즈의 음모(푸랑수아 2세때 섭정이었던 기즈공이 신교도들을 함정에 빠뜨려 1500명 이상을 죽인 사건)'가 발생한 1560년까지 왕의 주요 거주지였다. 고닥양식으로 성을 증축하던 중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샤를 8세가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해 청문과 탑을 배치해 우아하게 완성했다. 덕분에 프랑스 건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잘 조화된 초기 사례로 꼽힌단다.











다빈치의 묘가 있는 생튀베르 에배당의 모습이다. 많은 고성들 중 앙부아즈와 슈농소 성만 내부를 보기로 계획했는데 이 성은 말할것도 없이 다빈치라는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여서 먼저 그의 묘를 찾았다.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약 3년간 루아르에서 여생을 보내다 숨을 거두었고 이것이 루브르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이 있게된 계기가 되었다.









밖으로 나가 바깥 전망을 보았다. 앙부아즈는 성도 아름답지만 마을이 예쁘기로 유명하다. 식당과 상점들도 옛모습을 살려 나름의 멋을 뽐내고 있었다.



미님탑이다. 두 건물이 만나는 지점과 연결된 이 탑에 오르면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강바람이 시원하다. 물론 땡볕이지만. 르네상스 양식의 거대한 탑으로 남쪽에 이 탑과 대칭으로 건축한 외르토탑이 있다.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인 불을 뿜는 도룡뇽의 모습이 보인다.


입기에는 조금 작은듯한 철갑옷도 서 있다.




창문이 많아 밝은 빛으로 가득찬 북치기의 방에 걸려있는 테피스트리와 가구다.

이방은 단아하면서도 세밀한 조각과 붉은 벽돌이 돋보이는 회의실인데 왕의 공식 접견과 대규모 연회가 열리던 곳으로 벽난로와 기둥, 천정 등에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가득하다.






역시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지 내부는 대부분 프랑수아 1세와 다빈치의 인연으로 채워져 있었다.







앙리 2세의 침실이다.





매듭 달린 허리띠의 대기실에 있는 벽난로 매듭 장식은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상징한단다.

루부르에 있는 다빈치의 그림이니 사본이겠지?



루이 필리프 아파르트망이다. 루이 12세가 사용한 방들을 재현해 놓았는데 이방은 간단한 업무를 보던 집무실이다.


침실의 모습인데 침대는 거울에 살짝 등장하고 있네.


루이필리프 가족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음악실로 두 아들 중 큰아들이 바로 상티이성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오말공의 어릴적 모습이다.






성 위에서 보니 정원이 예뻐서 그곳으로 가보았다. 나무들을 둥글게 가꿔 놓았네. 강에서 가장 가까운 르네상스식 나폴리 테라스로 루아르 강을 조망하기 좋고 규모는 작으나 오밀조밀한 프랑스식정원과 포도밭, 레바논 삼나무등이 있다.









이 동양식 정원은 포로로 잡혀 앙부아즈성에서 지낸 알제리 족장 압델카데르를 따라왔다가 죽은 수행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단다.


내려오는 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흉상이 보인다. 진본은 아까 보았던 성의 내부에 있고 사본인데 이 자리에 원래 그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앙부아즈를 떠나 루와르에서 가장 우아하다는 귀부인들의 성인 슈농소성으로 향했다. 13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금방 도착하긴 했는데 마감시간이 채 10분도 남아 있지 않아 입장 자체를 못하게하는 것이었다. 성의 외관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아예 입장조차 못하게하니 좀 섭섭했지만 다음을 위해 남겨 놓기로 하고 숙소가 있는 투르로 차를 돌렸다.(35킬로)

먼저 생 마르탱 성당과 샤를마뉴탑이 우릴 반겨준다. 역시 성당 근처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4세기에 투르의 대주교 생 마르탱이 죽은 후에 이지역에 묻혔고 11세기에는 그의 무덤 위에 생 마르탱 대성당이 세워졌다. 11세기에 재건축했으나 18세기에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성당은 파괴되고 이 탑만 남았다고 한다.지금의 성 마틴 성당은 이 탑 옆에 19세기에 다시 지어져 세워진 것이다. 투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성지순례 코스에 포함된 도시로 종교적으로 중요해서 대규모성당을 지을 수 있었고 근처의 시계탑까지도 이 성당에 속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성당이었다.

<샤를마뉴탑>


<시계탑>

생 마르탱 성당은  투르의 세 번째 주교이자 성인인 생 마르탱(Saint Martin, 316~397, 재임 371-397)이 묻힌 유서 깊은 장소이다. 생 마르탱의 제자이자 그의 뒤를 이어 투르의 네 번째 주교가 된 생 브리(Saint Brice, 370~444, 재임 397-444)의 명으로 5세기경 교회가 처음 들어섰으며 이후 11세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크가 새로 건립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오랜 세월로 인해 파괴가 심한 성당을 19세기 말부터 신 비잔틴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증축한 것이다. 아치형 입구와 우아한 장식이 돋보이는 입구 양쪽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으며 뒤쪽에는 거대한 돔이 있다. 예배당 지하에는 생 마르탱의 유해가 안치된 아름다운 석관이 놓여 있다.




헝가리의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로마에가서 군인 생활을 하던 생 마르탱은 우연히 거리에서 걸인에게 망토를 벗어 건네주는 선행을 베풀게 되고 이후 꿈에 그 걸인이 다시 나타나 자신이 예수임을 밝혔다고 한다. 이 선행과 꿈을 계기로 생 마르탱은 사제가 되어 포교에 힘쓰게 되고 투르의 첫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투르의 대표 성당인 생 가티엥 성당을 찾았다. 16세기에 완성된 이 성당은 투르의 초대 주교인 생 가티앵에게 바쳐졌고, 성당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르게 되었다. 성당 이름이 프랑스에서 널리 사용되는,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노트르담'이 아니고 주교의 이름을 따랐다는 것은 그만큼 투르에서의 주교 영향력이 막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 가티앵 성당은 전면 양쪽에 약 70m 높이의 첨탑 두 개를 가진 웅장한 건물이다. 이 성당은 1170년부터 1547년까지 4세기에 걸쳐 지어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고딕양식 외에도 로마네스크 양식 등 여러 시대의 양식들이 섞여 있다. 성당 정면에 솟아 있는 첨탑 양식도 조금 다르다. 한 첨탑은 로마네스크 양식 위에 고딕 양식으로 이루어진 반면, 다른 한 첨탑은 전체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자세히 보면 첨탑의 높이가 조금 달라 보이는데, 1957년에 재건된 북쪽 첨탑이 1547년에 완성된 남쪽 첨탑보다 약 1m 정도 높다.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구조의 숨 막힘보다는 밸런스를 조금 깨트린 첨탑의 구조가 더 편안해 보인다.

성당 전면 파사드에 있는 끝이 뾰족한 아치형 문은 화려한 중세시대의 플랑부아양 조각들로 꾸며져 있다. 고딕 후기의 이 양식은 화려함을 자랑하며 불꽃 모양으로 타오르고 있는데 단순한 듯 하면서도 복잡하고 길게 뻗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이 생 가티앵 성당에서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성인과 주교들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내부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이다.

성당 내부는 중세 13~15세기에 만들어진 채색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로 현란하고 아름답다. 성당 벽체를 온통 둘러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빛은 성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는 성스럽고 신비로워 보였다.









이 석관은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안느 드 브르타뉴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의 석관이다. 석관 위의 어린이 조각상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석관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린 생명들의 유해가 담겨 있다. 왕비인 안느 드 브르타뉴의 명에 의해 프랑스 조각가 미셸 콜롱브가 1506년에 조각한  이 아름다운 석관과 석상은 투르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원천으로 하여 이탈리아 양식으로 장식한 최초의 기념물이다. 원래 투르 시내 구시가 서쪽의 생 마르탱 성당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프랑스혁명 기간에 프랑스의 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다행히 파괴의 손길은 피해 간 후 1834년에 투르를 대표하는 이 생 가티앵 성당으로 옮겨졌다. 화려한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석관은 이탈리아 서북부의 유명한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청회색 빛이 나는 백색으로 빛나고 있는데  프랑스 조각가들과 이탈리아 장식주의자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 새로운 조각상을 만들어 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 명작이다.

샤를 8세 아들 석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들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애처롭다.





스테인드 글라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성당 전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원형 스테인드 글라스, 로자스(Rosace)이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이 장미꽃 모양의 장식은 순수하고 화려한 15세기 고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 '장미의 창'은 생 가티앵 성당 내에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미술관으로 들어가보니 난데 없이 정원이 펼쳐져 있다.

이 거대한 나무는 레바논 삼나무로 그러고 보니 어딜가나 이 나무가 많이 보였다. 프랑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무인가보다. 우리에게는 백향목으로 불리운다. 여하튼 몇백년은 되었는지 가지를 바닥까지 늘어뜨려 받치고 있다.








삼나무와 함께 투르 대성당(생 가르탱)의 첨탑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