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렘브란트 특별전

boriburuuu 2019. 7. 4. 23:55

레이크스라는 별명으로사랑받는 국립미술관은 중앙역을 지은 카위파르스가 설계했고 1885년에 개관했다. 도개의 탑이 있는 거대한 건물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 전용 건축물이란다. 2013년 봄, 10년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새롭게 태어났다.

 

천장의 구조물이다.

 

바닥에 놓여 있는 의자들도 작품 같다.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앙증맞은 네덜란드 인형들이 서 있어 사진 촬영을 한다.

 

 

 

 

 

천정에 매달려 있는 이 꽃들은 위 아래로 이동하며 폈다 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렘브란트 특별전을 하고 있어 먼저 보았다. 자화상과 스케치 작품까지 .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한 자화상 1661년>이다. 55세에 제작한 작품으로 성바오로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는데 망토 깃 아래로 노출된 단검의 손잡이와 히브리어가 적힌 종이 두루마기등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치 새로 태어난 성 바오로 같다. 렘브란트는 성인과 열두 사도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모습은 친근함이 강조되었다. 화가가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섭거나 멀게 느껴지는 바오로가 아니라 위안이 되는 인간적인 바오로이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이다. 작은 그림으로 22세의 자화상이다. 이 그림에서 그의 얼굴은 어두움에 가려져 있고 오른쪽 볼과 귀 부분만 밝게 빌나고 있다. 시선은 그림을 보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데 뭉친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을 붓의 손잡이 부분으로 맡의 색을 가늘게 나타나도록 긁은 효과란다.

 

 

 

 

 

 

 

렘브란트의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이다. 레브란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룸 초상화 작품으로 이 그룹은 서로 다른 종교가 원활한 상업 활동을 위해 화합한 암스테르담의 관용적 단체다. 왼쪽 끝에 앉은 사람은 가장 연장자인 카톨릭의 직물 상인이거 또 한명의 카톨릭, 한 명의 프로테스탄트, 한 명의 캘빈주의자. 또 한 명의 메노나이트 파로 구성되어 유럽 중 암스테르담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공동생활의 완전한 예다. 렘브란트는 검정 옷을 입은 여섯 남자를 규착적으로 배열하지 않았지만 생기 있고 활력적인 구성을 표현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렘브란트의 <마리아 트리프>의 초상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요하네스 웨튼보카르트의 초상>이다. 이 사람은 네덜란드 종교개혁에서 프로테스탄트 경향으로 관용적 온건파에 속해 있던 인물로 약간 측면으로 돌리고 있는 부풀린 상체에 펼친 왼 손을 가슴에 놓은 것은 그가 종교인임을 나타내고 생애를 바친 완전한 충성심을 나타낸다. 당시 그는 76세 였으나 힘이 넘치고 투쟁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부드럽게 주름진 백색의 옷깃 장식이 얼굴을 감싸고 있으며 사색에 잠긴 그의 눈에서 연륜을 읽을 수 있다.

 

렘브란트의 <<오프옌 코피트 초상>>이다.

 

렘브란트의 <<마르텔 솔만스 초상>이다.

 

<마르텔 솔만스 초상>

 

 

 

 

렘브란트의 <돌다리>다. 유난한 빛을 발하는 무성한 나무는 작품의 기하학적 중심을 형성하지는 않으나 왼쪽에서 광채가 나고 오른쪽은 어두운 중간의 나무는 중심처럼 느껴진다. 그는 주변을 펜으로 자주 스케치했고 판화로 제작했다. 이 그림은 유화 기법을 사용한 작은 크기의 풍경화다.

 

 

 

 

 

 

 

렘브란트의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요셉>이다.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다.  “내가 만약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 앞에서 빵 한 조각만 먹으며 2주일간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인생에서 10년도 기꺼이 내놓을 것”이라고 빈센트 반 고흐는 고백했다고 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정확하진 않으나 성경에 나오는 이삭과 그의 아내 레베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은 남편의 애정 어린 행동에 신부는 그 손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답하고 있으며 이는 혼인의 풍요로움을 암시하는 행동이다. 팔레트나이프를 통해 물감을 재빠르고 강한 터치로 응고시켰고 붉은색, 갈색, 금빛이 어루러져 용해되고 있다. 렘브란트의 말년작이며 울퉁불퉁하고 치밀하게 덧칠한 재질이며 이는 고흐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렘브란트의 <예루살렘의 파괴로 슬퍼하는 예레미아>다. 비탄에 잠겨 머리를 손에 기대고 팔꿈치로 거대한 볼륨의 성경을 누르고 있는 예레미아의 모델은 최근 사망한 화가의 아버지다. 화면 왼쪽에 고대 사원에 있는 대형 원형 건축물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세밀한 묘사나 마무리를 포기하고 망상에 잠긴 등장 인물의 모습을 상상력이 풍부하게 그려낸다. 물감을 여러겹 겹쳐진 덩어리로 쌓아 올려 조각처럼 작업했으며 움직임이 있거나 투명한 부분은 물감의 두께를 달리해 변화를 주었다. 이는 선과 형태의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렘브란트의 <토빗과 안나>다. 르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를 더 존경한 렘브란트는 <토빗과 안나>(1626)라는작품에서 아내가 새끼염소를 훔쳤다고 생각하면서 슬픈 표정으로 기도하는 토빗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 토빗이 시력을 상실하자, 아내인 안나는 하루 종일 베를 짜서 주인에게 갖다 주고 삯으로 새끼염소 한 마리를 얻어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먼 토빗은 아내의 말을 믿지 못하고 불안과 염려로 가득차 있으며, 안나는 자신의 진실을 믿어주지 못하는 남편을 향한 어리둥절함과 불만을 안고 서 있다. 토빗의 경건함이 안나의 신실함을 읽어내지 못한다. 토빗과 같은 가톨릭교회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온갖 성상과 성물이 가득 들어찼다. 본래 성상과 성물은 신자들의 믿음을 북돋기 위한 도구였지만, 구복신앙과 미신을 조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를 문제 삼은 종교개혁가들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로마교회는 단죄하는 데 급급했다. 렘브란트는 그렇다고 종교개혁을 무조건 환영하지도 않았다. 미신에 물든 가톨릭이 ‘눈먼 장님’이라면 개신교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눈 뜬 장님’이라 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처음부터 제시하셨던 옛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렘브란트의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의 초상>이다.

 

렘브란트의 <무녀 안나>다. 주름진 손으로 성서의 책장을 넘기며 성격을 몰두해서 읽고 있는 노인의 모델은 화가의 어머니다. 신성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내기 위해 늙은 노인의 용모를 강조하고 있는듯하다. 여기에 나타난 것을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식 빛의 대비다. 렘브란트는 색상의 조화, 반사의 효과, 강렬하게 반짝이는 효과 등 플랑드르의 미술 기법과 이것을 조화시켰다.

 

 

 

렘브란트의 <동방의 옷을 입은 남자>다.

 

 

 

 

 

렘브란트의 <수도복을 입은 티투스의 초상>이다. 1642년 30세이던 화가의 아내 사스키아는 출산 후 앓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렘브란트는 아들 티투스를 매우 아꼈다. 티투스는 사스키아의 자리를 대신해 렘브란트를 지킨 금발에 예리하고 부드러우며 지적인 소년이었으나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따라서 렘브란트가 그린 아들의 초상화는 보호와 애정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듯하다. 거칠거칠한 수도복을 모든 음영의 갈색으로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의 스케치본이다.

 

 

 

 

 

 

 

 

 

 

 

 

 

 

 

 

 

 

 

 

 

렘브란트의 <세번 부인하는 베드로, 베드로의 부인>이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번 부인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했으나 여종이 "당신은 갈릴리 사람 예수와 같이 다니던 사람이군요?"라고 말하자 살기 위해 세번이나 부인했고 닭이 울었다는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역시 여종과 베드로에게 집중시키는 빛의 효과가 남다르다. 

 

판화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었는데 색이 없이도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되는 것이 놀라웠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인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대>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이 박물관에 꼭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난번 왔을 때 반고흐 미술관을 보고 가는 길에 박물관 앞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을 보고 언젠가 꼭 와봐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암스테르담의 시민 민병대 건물의 사령부를 장식하기 위해 여러 화가들이 5개의 연작을 그렸는데 다른 화가들이 등장 인물들의 유니폼, 갑옷 등 회화스러움에 비중을 두고 모든 인물을 같은 높이에 두었으나 렘브란트는 연극적인 장면으로 생기있는 화면을 창안했다. 오른쪽의 북은 행군의 리듬을 나타내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들이 행렬을 준비하고 있다. 가운데의 프린스 바닝 코크 대장 옆에는 그의 중위 빌리엄이 행진하고 있고 중간 왼쪽의 어린소녀의 허리에 매달인 닭은 민병대의 상징이다. 이 그림은 민병대 대부분의 불만을 샀고 그가 쇠락의 길을 걷는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