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

boriburuuu 2019. 7. 6. 21:46

루도비코 카라치가 그린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꿈>이다. 

 

바티스카 모로니의 <부채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의 초상>이다.

 

 

 

틴토레토의 <오타비오 스트라다의 초상>이다. 이 작품의 모델은 유명 골동품 수집가인 지코보 스트라다의 아들로 한 손에 작은 조각상을 들고 큰 나체의 조각상 옆에 서 있으며 뒤에는 위풍당당했던 로마가 보인다. 젊은 스트라다는 코르누의 동전을 자기 손에 붓고 있는 풍요의 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잇다. 이 그림에서 흘리듯 빠르게 그려나가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전형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피에르 드 코시모가 그린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초상>다. 모델은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이다. 이 화가의 눈 부분은 세부적인 부분 묘사에 심혈을 기울여 그렸고 이는 그가 선호했던 북유럽 회화와 유사하다. 아래 깃털이 거의 잘린 펜은 그의 왕성한 활동을 의미한다. 어깨 너머의 풍경의 밝은 빛은 이탈리아적 테마다.

오른쪽은 <프란체스코 잠베르티의 초상>이다. 모델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아버지이자 메디치가의 세공사였던 프란체스코 잠베르티다. 탁자의 악보를 보면 그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음을 알수 있다. 가구를 만드는 이 늙은 장인의 붉은 색 모자는 머리카락 뭉치와 귓볼을 누르고 있으며 그 뒤로는 역시 북유럽 취향의 전원 풍경과 건축 양식이 배경의 일부로 보이고 있다.

 

코시모 로셀리의 <아기 예수의 경배>다.

 

베네디토 브글리오니의 <성 니톨라스와 성 제로니무스 사이의 성모자>다.

마르텐 반 햄스케르크의  <여자의 초상>이다. 오른쪽은 <남자의 초상>이다. 이 작품은 피터 비게르와 안나 코데로 부부처럼 여겨졌다. 네덜란드 개인 초상화 기법의 성공작으로 중산층 계급의 사람들은 제단화의 주문자처럼 성인의 그림 옆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사후 명성을 후대에 전하려 했다. 여자는 가사 활동의 표현, 상반신과 손의 정면 자세, 얼굴의 형태는 당시 초상화가들에게 개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대담한 요소들을 보이고 있다.

 

 

안토니스 모르 반 다스호르스트의 <토마스 그레샴과 그의 아내 안의 초상화>이다. 토마스 그레샴은 16세기 능력있는 재정가 중 하나였다. 화가는 16세기 초상화가들 중 한사람이고 티치아노가 그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그림을 다시 제작했는데 티치아노의 그림과는 다른 매끄러운 표면, 선명하고 면밀한 효과, 차갑게 정돈된 양식으로 구별된다.

<성 아그네스 앞에 기도하는 게르트루이 해크 무릎 꿇기>이다, 익명 c. 1465
이 그림은 죽은 사람의 기억을 기리기 위한 '기억의 태블릿'이다. 그것은 아마도 도르드레흐트 성 아그네스 수녀원 교회에 있는 게르트루이 헥반 슬링글란트 반 데르 템펠의 무덤 근처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거트루이는 세인트 아그네스 앞에서 기도를 하고 무릎을 꿇는다. 비록 게르트루이는 자신이 서품된 수녀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경건함의 표시로 수녀의 습관을 쓰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세인트 제롬과 세인트 캐서린>이다. 익명, c. 1480 - c. 1490
제롬과 캐서린은 장미 덤불 앞에 풀로 덮인 벤치에 앉아 있다. 두 성도는 사자와 함께 제롬과 칼과 부러진 바퀴를 가진 캐서린이라는 속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캐서린은 왕의 딸이었고 부유한 궁녀들의 역할 모델로 활동했다. 그녀는 하트 모양의 책을 들고 있다.

 

<레넨 공성전>이다. 레넨의 사부, c. 1499 - c. 1525
1499년 7월 8일, Guelders 공작의 병사들은 위트레흐트 지방의 레넨 마을로 행진하여 가면서 집에 불을 질렀다. 공작은 그의 권력 기반을 확장하려고 시도했지만 공격은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후퇴했다.

<에체 호모>다, Brunswijkse Monogrammist, c. 1525 - c. 1535
에체 호모는 '사람을 보라'는 뜻이다. 계단 꼭대기에서 체포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화가는 이 중요한 성서 이야기를 자신의 시간의 상상의 도시에 설정했다. 일상 생활은 평소와 같이 계속된다. 건축 작업은 계속되고, 시장은 있으며, 항구에는 선박이 하역된다.

<바벨탑>이다, 익명, c. 1490
구약성서는 천국에 닿을 탑을 짓고 싶었던 바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만심 때문에 그들을 벌하셨다. 그는 그들의 공통 언어를 혼란스럽게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했다. 이것은 이 이야기의 가장 초기에 그려진 묘사 중 하나다. 그것은 또한 늦은 중세 건축 관행을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일면을 제공한다.

 

알크마르의 장인의 <일곱가지 자선>이다. 일곱개의 패널이 하나의 틀로 연결되어 있는 이 작품은 네덜란드 회화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초기의 원본이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베풀어라.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어라,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옷을 주어라, 시체들을 무덤에 묻어 주어라. 순례자들에게 묵을 곳을 주어라. 병자들을 방문하라.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 주어라'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주제의 구성 밑에는 하늘의 보상에 대한 언급이 있다.

< 성 엘리자베스의 날 홍수, 성 엘리자베스 패널의 마스터>, c. 1490 - c. 1495

1421년 11월 19일 밤, 즉 성 엘리자베스의 잔치 날, 네덜란드의 많은 지역이 물에 잠겼다.,도르드레흐트 지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23개의 마을이 물에 잠겼고 2,000명이 사망했다.,생존자들은 나중에 제단을 만들었다. 외부 패널은 오른쪽에 있는 제방과 왼쪽에 손상되지 않은 도르 드렉 트 마을이 뚫린 재난을 묘사한다. 

카를로 크리벨리의 <마리아 막달레나>다. 카메리노의 대성당을 위해 그려진 세 폭 제단화 중 일부다. 이탈리아 회화에서 오리엔탈 춤의 포즈를 보기 드믄데 크리벨리는 세밀한 표현으로 성녀의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완성했고 얼굴의 넓은 이마는 유행했던 모델을 상기시키며 자신만만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성녀의 후광은 도금된 상반으로 표현했고 얼굴 주변에 국화꽃, 장미, 부푼 콩 등을 그렷다.

왼쪽 그림은 <그리스도는 어머니를 떠나고>이다, 코넬리스 엔게브레츠, c. 1515 - c. 1520
이 패널과 그 옆에 있는 그림은 성모님의 삶에서 일련의 장면의 일부를 형성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본다.

오른쪽 그림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마리아와 마사 가문 방문>이다, 코넬리스 엔게브레히츠, c. 1515 - c. 1520
여기 극적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옆에 마사와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 앉고, 후자는 바닥에 그의 발에 앉는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구인 마리아 둘 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단념시키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다.

<십자가형, 제이콥 코넬리스 반 오스트사넨, c. 1507 - c. 1510>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산 골고타를 묘사한 것에 대해 화가는 높은 관점을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열정의 연속적인 에피소드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광대한 풍경을 만들었다. 이 서사적 관습은 중세 회화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리스도> 퀸텐 마시즈(I), c. 1510 - c. 1515
16세기 초 앤트워프의 대표적인 예술가 마시즈는 예수의 고통에 대한 강렬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예수는 전경에 가까이 나타나서 거의 접선하여 시청자와 연결된다. 십자가의 무게 아래 피투성이가 되고 기절을 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묘사는 예배자들이 예수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십자가형과의 여행>익명, c. 1460
중심에 있는 십자가는 위트레흐트 시의 배경에 맞선다 ,따라서 성서 장면은 중세 시청자들에게 어떤 현실을 보여준다. 왼쪽에는 미사를 축하하면서 그리스도의 비전을 경험한 교황 그레고리 대왕이 있다.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아이와 그의 어깨에 인류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