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2

boriburuuu 2019. 7. 6. 22:05

루이 모리츠의 <드로잉 수업>이다. 1808년
드로잉 레슨과 음악 레슨은 펜던트이다. 그들은 루이 나폴레옹이 설립한 행사인 리빙 마스터스 첫 전시회에서 1808년에 전시되었다. 내부와 인물은 고전적 고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여자의 옷은 그리스 가운과 닮았고, 이 강의의 드로잉 모델은 이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 부흥 사례와 비슷한 고전적 흉상이다. 

루이 모리츠의 <음악 수업>이다. 1808
드로잉 레슨처럼, The Music Lesson은 다른 공간을 통해 볼 수 있는 인테리어를 설정한다. 문 위에는 그리스 신 아폴로가 리어를 연주하는 대리석 안도감이 있다. 두 여성은 음악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기타와 음성 듀엣을 연습하고 있다. 전통에 따르면 화가 자신이 선생님의 모델 역할을 했다.

<,러브레터>다, 빌렘 바텔 반 데르 쿠이, 1808년
19세기의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사진에서 반 데르 쿠이는 일반적으로 17세기 테마인 연애편지 전달을 되풀이했다. 그 아가씨와 젊은 메신저 사이의 긴장감은 거의 뚜렷하다. 그러나 러브레터는 또한 매우 현대적이다. 왜냐하면 인테리어, 헤어스타일, 의류는 전적으로 1808년의 패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습 중단>이다. 윌렘 바텔 반 데르 쿠이 , 1813
프리지아 화가 윌렘 바텔 반 데르 쿠이는 아이들을 묘사하는 데 명수였다. 이 그림의 아이들은 너무나 장난스럽고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작품이 스냅사진과 닮았다. 그러나 반 데르 쿠이즈는 아이들이 삼각형 구성을 형성하도록 조심스럽게 배열했기 때문에 마냥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이 그림이 초상화인지 상상의 장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얀 발렘 피네만의 <워털루 전투>이다.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싸웠던 네덜란드의 워털루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가운데에는 웰링턴 장군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왼쪽으로는 부상을 입은 빌럼 2세가 그려져 있다.

 

 

1807년 헨드릭 부그드의 < 소나무가 있는 이탈리아 풍경>이다.
부그드는 황금빛으로 가득찬 그의 역사 풍경으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레인의 이름을 따서 '네덜란드 클로드'로 알려졌다. 부그드는 늦은 오후 로마에 있는 빌라 보르게세의 정원을 그렸다. 태양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눈에 띈다. 웅장한 석양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전경에는 예술가가 나무에 기대어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1830년 코넬리스 크루세만의 <Of One Heart>
코넬리스 크루세만은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때때로 '이탈리아 크루세만'이라고 불렸다. 로마(1821~1825)에서 시간을 보낸 뒤 이탈리아에서 알고 있는 이상화된 스타일로 네덜란드에서 일했다. 민속 의상을 입은 이 젊은 음악가 3인조는 이것의 좋은 예다. 이 갤러리에서 또한 Piety와는 달리, 크루세만이 Of One Heart를 그릴 무렵, 그는 사실상 네덜란드의 사실주의를 포기했다.

<피에티>  코넬리스 크루세만, 1823년
1821년 크루세만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 그림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그것을 그렸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회화 전통을 결합한 것이다. 두 명의 나이든 인물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네덜란드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는 반면, 젊은이들은 이상화된 이탈리아 농민 유형이다. 나무에 있는 작은 마리안 제단은 크루세만의 위대한 역할 모델인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의 작품의 정확한 사본이다.

앤루이스 질로드 트리슨의 <네덜란드의 여왕 호르텐스 보하르네스의 초상>이다.

토마스 로렌스의 <그녀의 두 아이와 함께 있는 마리아 마틸다 빙헴>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돈 라몬 사투에 초상>이다. 고야의 그림 양식은 근대에 이르러 유럽 미술문화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졌다. 70세 가량이던 그는 검은 그림들을 그린다. 검은색은 파괴와 음울함을 나타내는데 이 시기에 제작된 초상화 중 하나다. 모델은 유명 사법관인 사투에로 그림의 배경으로 주인공의 얼굴을 강조한 검은색을 선택했고 화면을 단순화시켰다. 조끼의 빨강색과 셔츠의 흰색이 그의 인상을 돋보이게 할 뿐 아무런 장신구도 없이 편안한 모습이다.

<윌리엄 1세, 네덜란드 왕> 조셉 페일린크, 1819년
나폴레옹이 1812년에 패배했을 때, 오렌지 - 나소 왕자 윌리엄 프레드릭은 1813년에 네덜란드의 주권 왕자로 돌아 왔다.나폴레옹이 엘바에서 탈출한지 한 달 후, 그는 네덜란드의 연합 왕(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과 룩셈부르크 공작을 선언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난 후 그는 1815년 윌리엄 1세로 취임했다.

 

 

 

 

 

헨드릭 야코부스 스콜튼의 <바돌로무스 반 더 헬스트의 화실을 방문한 오랑쥐의 왕자>이다.

<바위가 많은 해안>이다, 위나드 누이젠, c. 1837
이 그림은 네덜란드 낭만주의의 하이라이트이다. 그것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무의미함을 묘사한다. 폭풍 속에서 3명의 마스터가 절벽을 걷고 망가졌다. 승무원들은 물건들을 찾기 위해 해변을 혼란스럽게 헤멘다. 태양 광선은 어두운 하늘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압도적이고 가파른 바위 절벽 앞에 사람들이 더 작아 보인다.

겨울 경관, Barend Cornelis Koekkoek, 1835 - 1838
이 겨울 풍경을 위해 Koekkoek은 Gelderland 또는 Lower Line의 독일 지역에서 구불 구불한 풍경을 선택했다. 그의 인상적인 숲 풍경과 달리, 이것은 침착한 장면이며, 남자들은 스프록 나무와 야채로 덮인 썰매에서 멈춘다. 멀리서 안개가 낀 파노라마가 보인다. 이 그림은 겨울철의 흐릿한 자연을 묘사한다. 눈의 순결로 덮인 세계다.

 

 

 

 

 

자화상, 우터 반 트로스트위크 1809
유망한 화가 우터 반 트로스트위크는 밤에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걸린 감기로 젊어서 죽었다고 한다. 예술가의 삶은 이보다 더 낭만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틀리에가 죽기 직전에 만든 이 비공식적인 자화상에서 그려져 있다. 찬장 위에 함께 놓여진 것은 전통적으로 화가가 사용했던 모델인 고전 조각의 석고 주조물이다.

1839년 요하네스 보스붐의 < 루앙의 퀘이 드 파리>다.
낭만주의 시대에 노르망디의 그림 같은 프랑스 도시 루앙은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그들은 중세 건축을 좋아했고 위대한 성당을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이 그림의 부두를 따라 있는 집들은 그들 뒤에 솟아 있는 성당 탑들을 등에 지고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1818년  피에터 제라르두스 반 오스의 < 그레이블랜드에서의 항해>다.

1817년  피에터 제라르두스 판 오스의 <초원에 관한 연구>다.
당시에는 모두가 이 미개척 경관과 놀라운 관점에 대해 흥분하지는 않았다. 한 비평가는 반 오스가 자연을 더 아름답게 제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림과 '그레이브랜드 항해'를 비난했다. 이제 우리는 이 그림을 네덜란드 풍경에 대한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비전 때문에 19세기 초 네덜란드 그림의 걸작으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