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캄보디아

여행의 백미 "앙코르 왓"을 돌아보며 1

boriburuuu 2019. 12. 9. 19:09

우리는 주차장에서 내려 앙코르 왓으로 향했다. “앙코르 왓(Angker Wat)은 수리야바르만 2(1113~1145재위)가 건설한 것으로, 세계 최대의 종교 건축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존이 잘된 사원, 지상에 재현한 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사원(축성도시)이다. 기존의 건축을 집대성해, 감히 인간이 만들었다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신들의 세상을 지상에 재현시켰다고도 한다.

 

 "앙코르 왓(Angkor Wat)"은 비슈누의 신성한 거처라는 뜻으로, 시바와 왕을 동일시했던 기존의 크메르제국 왕들과 달리,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비슈누와 동일시해 통치했다. 비슈누는 우주의 유지를 담당하는 신이니, 지상을 통치하는 왕으로 적격인 셈이었다.

 

 앙코르 왓은 가로 1,500m, 세로 1,300m 크기로 총면적은 2제곱Km에 이르렀다. 성벽을 감싼 해자는 폭이 200m인데, 씨엠립강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해자에 아직도 물이 고여 있었다. 신전을 이루는 담과 회랑은 세 겹이고, 층을 높여가며 건설했기 때문에 구조가 복잡했다. 여러 개의 사원이 중첩된 것 같지만, 지면부터 65m 높이로 쌓아올린 거대한 건축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대칭과 균형을 이루었다. 특이한 것은 서쪽 문으로만 출입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앙코르 왓이라고 하면 사원을 연상하나, 해자부터 생각한다면 축성도시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크메르 건축 양식에 따라 왕궁은 신전 북쪽에 배치하고, 마을은 신전 앞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들이 사는 사원을 제외하고, 2만 명이 살던 곳은 모두 나무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현재는 왕궁과 마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앙코르 왓에서 사원이 차지하는 면적은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가 앙코르 왓으로 가려고 정문인 서문 출입구로 갔다.  그곳 해자 앞에는 커다란 심하(사자)7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가 환영인사를 건넸다. 나가 계단을 올라가자, 200m 폭을 가진 해자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사원으로 들어가는 돌다리(난간 없는 나가 다리)가 있었다. 나가 다리(12m, 길이 250m)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무지개 역할을 하며,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것이란다.

 

<앙코르 왓 평면도>

 

<앙코르 왓 서쪽 해자를 건너는 나가 다리 앞의 심하(사자)와 나가 모습>

 

<앙코르 왓 서쪽 해자를 건너는 돌로 만든 나가 다리 모습>

 

 

 다리를 건너자, 해자에 감싸인 가로 1,025m, 세로 815m 크기의 성벽(외벽)이 나타났다. 성벽의 정중앙에는 연꽃 모양을 형상화한 고푸라(탑문)를 세워 출입구를 만들었다. 고푸라 오른쪽에는 팔이 8개인 비슈누 석상을 모시고 있는데, 원래 중앙 성소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사람이 많아 들어가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했다.

 

<앙코르 왓 서쪽 고푸라 모습>

 

 고푸라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 성소를 향해 참배로(10m, 길이 350m)가 직선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지면보다 살짝 높게 단을 올려 참배로를 만들었으며, 나가의 몸통이 길게 이어지며 난간을 만들었다. 참배로 좌우에는 백성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참배로 중간쯤에 좌우로 석조건물인 장경고가 있었다. 우리는 왼쪽으로 내려가 장경고를 보고, 사원과 장경고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의 인공연못(가로 65m, 세로 55m)으로 갔다. 인공연못도 참배로를 기준으로 완전 대칭되게 만들어져 있었다.

 

<고푸라를 지나 왕코르 왓으로 가는 참배로, 참배로 양 쪽이 백성들이 살던 곳>

 

<참배로 북쪽에 있는 장경고>

 

 참배로에서는 사원의 쁘라쌋()이 완전대칭으로 인해 3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왼쪽 연못 주위에서는 앙코르 왓의 균형이 깨지며, 5개의 쁘라쌋()이 모두 보였다. 특히 앙코르 왓이 연못에 반사되어, 연못 속에 또 하나의 사원이 있는 것 같았다. 왼쪽에는 음료수 등을 파는 곳이 있었으나 그곳에 들릴 여유가 없었다.

 

<참배로에서는 완전 대칭 건물이라 앙코르 왓 탑이 3개만 보임>

 

<참배로 북쪽 인공호수 옆에서 본 탑이 5개인 앙코르 왓 모습 1>

 

<참배로 북쪽 인공호수 옆에서 본 탑이 5개인 앙코르 왓 모습 2>

 

<앙코르 왓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1>

 

<앙코르 왓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2>

 

 

 우리는 바로 앙코르 왓 1층 출입구로 들어갔다. 담과 1층 회랑은 실질적인 사원 구역으로 가로 332m, 세로 258m 크기였다. 이 회랑에는 유명한 부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는 곧바로 건물을 지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중앙 성소로 오르기 전의 안마당 개념으로 설계해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1층과 마찬가지로 회랑(가로 115m, 세로 100m)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서쪽에 십자형 회랑을 추가했기 때문에 구조가 복잡했다.

 

<앙코르 왓 근경>

 

<실질적인 사원 구역인 앙코르 왓 1층 입구>

 

 우리가 2층에서 동쪽으로 나가니, 마당이 나왔다. 복판에는 2층을 기단으로 삼아 13m 높이로 단을 쌓아올려 앙코르 왓의 3층을 완성했다고 한다. 앙코르 왓 3층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리면서 안전과 사원 보존을 위해 출입인원을 제한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후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장시간 기다려야한다는 말을 듣고, 점심시간에 관광객이 적은 틈을 타서 온 것이다.

 

 

<앙코르 왓 2층 마당에 나가자 앞에 보이는 막아 놓은 계단 모습>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거기에는 새롭게 만든 나무계단이 있었다. 앙코르 왓 3층에 오르는 돌계단은 60도에 이르는 급경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계단과 손잡이를 만들어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했고,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서는 일정한 개수의 출입증을 만들어서 그것을 차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출입증이 남아있지 않을 때는, 위에서 한 사람이 내려와야 아래에서 한 사람이 그 출입증을 차고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줄을 서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바로 출입증을 차고 3층으로 올라갔다. 여기도 1, 2층과 마찬가지로 회랑(가로 60m, 세로 60m)에 둘러싸여 있었다. 3층을 한 바퀴 돌면서 기둥에 새겨진 압사라 등을 찍고,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3층을 거의 돌았는데, 일행 중에 이미 3명이 먼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9명이 된 우리는 3층 회랑에서 나와 중앙 성소가 있는 응달의 돌 위에 걸터앉아, 준비해 온 빵 등으로 요기를 했다.

 

<앙코르 왓 3층 건물에 조각된 압사라 1>

 

<앙코르 왓 3층 건물에 조각된 압사라 2>

 

<앙코르 왓 3층 건물에 조각된 압사라 3>

 

<앙코르 왓 3층 회랑에서 내다 본 주위 풍경 1>

 

<앙코르 왓 3층 회랑에서 내다 본 주위 풍경 2>

 

<앙코르 왓 3층 회랑에서 내다 본 주위 풍경 3>

 

<앙코르 왓 3층 회랑에서 내다 본 주위 풍경 4>

 

<앙코르 왓 3층 회랑에서 내다 본 주위 풍경 5>

 

<앙코르 왓 3층 건물 모습>

 

<앙코르 왓 3층에 모신 불상(아유타야와의 전쟁에서 패해 불상을 모심) 1>

 

<앙코르 왓 3층에 모신 불상(아유타야와의 전쟁에서 패해 불상을 모심) 2>

<나가 몸에 매단 종>

 

 우리가 앉은 곳에서는 중앙 성소 쁘라쌋이 잘 보였으며, 그곳에 조각된 비슈누와 압사라도 정통으로 보였다. 중앙 성소인 앙코르 왓 3층은 모두 5개의 쁘라쌋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메루산의 5개 봉우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3층의 경계를 이루는 모퉁이에 쁘라쌋을 하나씩 모두 4개를 세워 중앙 성소 탑을 감싸도록 했다. 중앙 성소 쁘라쌋은 비슈누를 모신 신전이었으나, 현재 내부 입장은 불가했다. 우리는 3층을 다시 한 바퀴 돌아보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내려왔다.

 

<빵으로 점심을 먹은 곳에서 바라 본 중앙 성소 쁘라쌋(탑) 모습>

 

<중앙 성소 쁘라쌋 중간에 조각된 비슈누>

 

<중앙 성소 쁘라쌋 중간에 조각된 압사라>

 

<중앙 성소 쁘라쌋 상인방의 조각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