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메트로폴리탄의 근현대 화가들

boriburuuu 2020. 10. 9. 01:03

에드워드 호퍼의 <투 라이트의 등대>다.  1929년.  이 작품에서 호퍼는 푸른 하늘의 열린 하늘에 맞서 등대의 극적인 실루엣을 격리시킨다. 메인주 케이프 엘리자베스의 바위 곶을 배경으로 한 이 건축물은 어두운 그림자에 의해 상쇄된 밝은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 당당하게 똑바로 서서 아래에서 보는 투 라이트의 등대는 변화나 자연에 복종하는 단호한 저항, 심지어 거절까지 상징하는 것 같다. 1914년부터 메인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던 호퍼에게 등대는 또한 뉴욕에서의 삶을 즐겁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에드워드 호퍼의 <숙녀들을 위한 테이블>이다. 1930년. 한 여종업원이 창문에 선명하게 칠해진 음식을 조절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인다. 두 사람은 판넬이 풍부하고 조명이 잘 들어오는 실내에 조용히 앉아 있다. 계산원은 자기 등록부에 영업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그들이 지치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여성은 집 밖에서 여성 도시 거주자들이 새로 이용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최근 사회 혁신을 암시하는데, 이 혁신은 이전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을 본다면 매춘부로 추정되었던 그들의 새로운 이동 여성 고객들을 환영하기 위해 "여성들을 위한 테이블"을 광고했다.

그랜트 우드의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이다.  1931년.  여기서 우드는 1863년 헨리 와즈워스 롱펠로우의 시에서 배운 미국 애국자 폴 리비어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새의 눈에서 볼 때, 이 그림은 매사추세츠의 식민지 마을 광장을 경마하는 리비어를 보여준다. 작품의 역사적 주제에도 불구하고 우드는 사실적인 정확성으로 장면을 묘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집들은 전등에 의해 켜지는 것처럼 지나치게 밝고, 극적인 달빛은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양식화된 집, 기하학적 녹지, 높은 시야는 그 그림에 다른 세계이거나 꿈같은 차원을 준다 

막스 뵉크만의 <시작>이다.  1946-194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자라난 벡만은 특히 상상력이 풍부한 여행을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기》에서 벡만은 애정과 유머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다. 이 화가가 65세였던 1949년에 완성된 이 패널들은 자서전적이다. 독일에서의 학창시절에 대한 벡만의 기억은 각각 오른쪽과 왼쪽 패널에 꿈의 환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중앙 패널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꿈의 세계가 뒤섞인다. 세계 대전과 독일에서 추방된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은 Beckmann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비극적인 주제를 표현주의적인 붓놀림과 밝은 색으로 통합한다. 

레올라 캐링턴의 <자화상>이다. 하얀 조드퍼와 거친 갈기 같은 머리를 뽐내며, 캐링턴은 이 호기심 많고 꿈같은 장면에서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손을 쭉 뻗고 있는 하이에나 쪽으로, 등을 뒤로 날고 있는 꼬리 없는 흔들의 말에 기대고 있다.영국의 산업가의 딸인 캐링턴은 어린 시절을 동물에 둘러싸인 시골에서 보내고 동화와 전설을 읽었다. 그녀는 성인기에 이러한 기억을 다시 찾아 실제와 상상의 생물로 가득 찬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캐링턴이 상징적인 대리인으로 사용했던 백마는 커튼이 쳐진 창문 너머의 초록색 풍경으로 자유롭게 질주한다.

찰스 데무스의 <I saw the figure No.5 in Gold>다.  1928년.  데무스는 1924년에서 1929년 사이에 현대 미국 예술가, 작가, 연주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8개의 추상 초상화를 완성했다. 데무스는 물리적으로 닮지는 않았지만 윌리엄스의 시 "위대한 형상"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친구인 시인이자 의사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초상화를 만들었는데, 이 초상화는 거리를 질주하는 소방차의 광경과 소리를 환기시킨다. 교차하는 선, 반복되는 "5", 숫자, 조명, 가로등 및 빨간 소방차의 굉음 사이렌의 둥근 형태는 함께 그림에 활기차고 도시적인 에너지를 주입한다..

샤임 그로스의 <East side Girl> 이다.  1928년.

조지 오키페의 <빨강, 하양, 파랑의 소의 해골>이다.  1931년.  대도시 생활에 지친 오키프는 뉴욕의 조지 호수로, 그리고 뉴멕시코로 정기적으로 휴양하기 시작했다. 1929년 남서부로의 첫 번째 확장 여행 이후, 그녀의 예술적 관심사는 뉴욕의 건물에서 뉴 멕시코의 성격으로 옮겨졌다. 이 작품에서 오키프는 들쭉날쭉한 가장자리, 마모된 표면, 표백된 색상을 강조하면서 하나의 두개골을 분리한다. 오키프에게 그러한 뼈는 사막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미국 정신의 힘을 나타냈는데, 줄무늬 배경에서 암시되고 있다. 1949년 오키프는 뉴멕시코에 영구히 정착하여 1986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가스통 라세즈의 <서 있는 여인>1912년. 이다. 나체여인의 조각상을 주로 만들었던 미국의 조각가 라셰즈의 대표작이다. 커다란 가슴과 배, 허벅지에 가는 손가락과 허리, 발목이 다소 과장된 느낌을 주는데 이 작품의 모델은 영원한 뮤즈이자 부인인 이자벨이다.

조지 모리스의 <인디언 컴포지션>이다.  1938년.   1930년대의 높은 평가를 받은 미국 큐비스트 화가 모리스는 파리로의 경력 초기에 형성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페르난드 레거와 함께 공부했고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났다. 모리스는 나중에 미국에서 비 객관적 예술을 홍보하는 데 전념한 미국 추상 예술가를 공동 창립했다. 그는 미국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기 위해 진정한 미국 추상화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인디안 구성은 점점 더 환원적인 12개의 작품 중 하나로서, 생물 형태와 선의 렌즈를 통해 수십 년 동안 원주민 경험을 탐구한 예술가의 모습을 나타낸다. 명백한 상징은 거의 없지만, 작품은 나바호 민족과 모더니스트 화가들이 예술에서 발견한 자료인 모래를 특징으로 한다. 

홀 우드루프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이다.

윌리엄 조라크의 <센트럴 파크의 봄>이다.

알버트 블로흐의 <여름밤>이다.

디에고 리베라의 <카페 테라스>다. 1915년.  파리에서 일시적으로 살면서 개발한 큐비즘의 뚜렷한 브랜드에서 리베라는 질감과 패턴의 대조를 증폭시키기 위해 Pointillism으로 알려진 기술인 작은 색 점들을 사용했다. 여기서 강력한 음료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매끈한 녹색 액체 병, 아마도 압생트, 반짝이는 금속 스푼은 제1차 세계대전을 지칭하는 위장 식탁보 스트립에 짝을 이룬다. 또한 그는 작은 멕시코 풍경 아래 BENITO JUA라고 적힌 부분 라벨이 붙어 있는 시가 박스와 같은 고국에 대한 언급도 포함하고 있다. 이 레이블은 1858년부터 1872년 사망할 때까지 멕시코 대통령인 베니토 후아레스를 가리킨다. 

헬렌 토르의 <바지선 위의 집들>이다.

 

 

 

제스퍼 존스의 <하얀 국기>다. 1955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존스는 목표물,지도 및 깃발과 같은 잘 알려진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다. 그의 말로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 플래그는 존스의 유명한 깃발 시리즈의 일부로서 1954년에 시작되었다. 이 렌더링에서 그는 특징적인 빨간색, 흰색 및 파란색 색상의 상징적인 주제를 빼서 유령처럼 국기 모양으로 남겨 둔다. 회화의 표백된 모습과 복합적이고 층이 많은 형태는 친숙한 이미지를 이상하게 만든다. 국가 상징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전하고 이 고충전된 미국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복잡하게 함으로써, 그것은 모호하긴 하지만 국가 정체성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말한다. 

앤디 워홀의 <비포 앤 에프터>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발걸음>이다. 1978년. 많은 사람들에게 만화를 바탕으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팝 아트와 동의어다. 긴장되고 극적인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이러한 묘사는 잡지, 광고,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가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감정까지 형성하는 현대인의 곤경에 대한 아이러니한 논평으로 의도된다. 리히텐슈타인은 또한 그의 모나리자에서 앤디 워홀이 했던 것처럼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마도 잘 알려진 예술의 걸작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워홀처럼 미술학교 배경을 가진 리히텐슈타인도 상업 예술가 겸 그래픽 디자이너(1951~57년)로 일했는데, 이 경험은 후기 그림의 주제에 영향을 미쳤다. 팝 아티스트로서의 리히텐슈타인의 명성은 1962년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첫 1인 전시회로 시작되어 평생 동안 그의 경력을 특징 짓고 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콜롬비아에서의 댄스>다. 1980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보테로는 16세의 나이에 지역 문학 잡지에서 일러스트 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초기 그림은 부풀려진 인물과 과장된 이미지의 더 잘 알려진 성숙한 스타일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전통적이었다.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낭만주의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시인들뿐만 아니라 지역 음악도 그의 예술에 가장 초기의 영향 중 하나였다. 나중에 보테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내가 매우 작았을 때부터 식민지 교회를 보았다. 식민지 그림과 다색 조각. 그리고 그게 내가 본 전부였다.,어떤 박물관에도 현대 그림은 단 한 점도 없었고, 피카소도 없었고, 브라크도 없었고, 차갈도 없었다. 박물관에는 18세기 콜롬비아 화가들이 있었고, 물론 나는 콜럼버스 이전의 예술을 보았다. 그게 내 노출이었어."

 

 

파울 클레의 <5월 사진>이다. 1925년. 이 그림은 1914년 튀니지를 방문한 클리의 매직 스퀘어 시리즈에서 나온 것이다.클레는 풍경을 사각형으로 분할하여 추상화의 전권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림의 가장자리 너머로 뻗어 있는 것 같다.사각형 자체는 모자이크를 형성하기 위해 조립된 이상한 모양의 돌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또한 클라이가 바우하우스에서의 가르침을 알려준 색채 이론에 집착하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