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미술관/비엔나 미술사박물관

미술사박물관 회화작품 3

boriburuuu 2020. 11. 2. 16:32

세례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살로메( 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Joseph ) heintz the Elder >. 유디트와 살로메의 그림은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 주제였는데 이건 칼을 들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살로메인 것 같다.

 

 

 

파르미기아니노가 그린 <활을 만드는 에로스, 1533-4>다. 큐피트의 그림인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발칙하다고나 할까? 자신의 상징인 활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래 왼쪽의 명랑한 표정으로 관람자를 쳐다보는 아기는 상호적인 사랑의 신인 안테로스다. 오른쪽의 아기는 사랑을 시들게 하는 힘을 의인화한 리세로스다. 그의 그림에 대한 영감은 아마도 1530년 베니스의 그리마니 컬렉션에서 파르미기아니노가 보았을지도 모르는 조각품에 의해 제공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에로스/아모르/쿠피드는 그림으로 그려진 조각품처럼 보인다. 이 주제는 에로스, 히메로스(욕망)와 포토스(롱잉)가 에로틱한 삼합체로 보여지는 후기 고대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은 천상의 사랑으로 재정의되었다. 여기서 파르미기아니노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사랑 사이에서 결정하는 어려움에 대해 논평하고 있다.

<마리아와 함께한 축복받은 헤르만 요셉의 비전> 안소니 반 다이크. 1630년.

프리몬스트라텐스 수도사가 메리에게 약혼을 한 것은 성모 마리아를 경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경외심이었다. 무릎을 꿇은 수도사의 자세, 몸짓, 안색에서 깊은 애정과 헌신과 감정이 발견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멀고 냉담하고 시원해 보인다. 팔과 어깨가 드러난 미소 천사는 구성과 내용 면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맡는다. 모든 감정이 그의 소용돌이치는 가운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필리포 프란체스코 데스테, 개와 함께한 마르체스 디 란조> 반 다이크 . 1634년.

1634년 11월, 새로 임명된 스페인 주지사인 유아 페르디난트 추기경의 재연의 일환으로 필리핀 프란체스코(1621~1653)와 시기스몬도 데스테의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1622~1695)이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반 다이크는 그의 세 번째 앤트워프 기간인 1634-35년에 브뤼셀에서 왕자들을 묘사했다. 그들의 궁정적인 스페인어 복장은 왕자들의 가톨릭 교양을 강조하고 있으며, 프팔츠의 개신교 "겨울왕" 프레데릭 5세의 자녀들과 함께 묘사된 사람들의 초기 신원을 반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렘브란트의 방이다. 화가의 운세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 제작된 이 그림은 성숙기의 렘브란트가 최초로 그린 자화상의 하나이며,불안정한 정서가 이 남성적인 용모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그전의 자화상 에서는 늘 장중함이 넘치며,때로는 희롱하거나 풍자적이거나 또는 자기의 천분을 의식하여 엄숙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자화상에 의하여 쓰인 그의 상세한 자서전 중의 분수령으로 되어 있다. 노년의 거장이 지닌 비애와 고독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극적인 선회가 시작된다.

<대형자화상>이다. 렘브란트 판 레인. 1652년.

이 자기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작가는 6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으며, 그의 생애의 조건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예술적 발전을 기록하였다. 화가가 변장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은 자신을 묘사했던 초기 성공 시절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자신만만한 자세로 단순한 갈색 예술가의 스컹크를 입고, 엉덩이에 손을 얹고, 허리띠에 엄지손가락을 끼고 있는 것을 본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49세때 그려졌다. 1642년 부인 사스키아가 사망 후 렘브란트는 생활이 곤궁해졌다가 결국 파산까지 하게 된다.

<자화상> 렘브란트 판 레인. 1655년.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역사적 의상의 묘사, 작업복의 초상화, 판타지 이미지 등이다. 16세기 패션에서 유래한 비레타는 렘브란트의 특징이 되었다. 금사슬도 초기 자화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화가의 반복적인 액세서리 중 하나이다. 그림의 상태는 어떤 확실성으로도 그것을 귀속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창가의 노인>이다. 사무엘 반 후그스트라텐. 1653년.

렘브란트의 제자인 후그스트라텐은 미술 이론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그림 기법과 공간적 환상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의 특기는 트롬페로일이었는데, 이것과 마찬가지로 "눈을 속인다"는 그림이었다. 한 노인이 돌틀로 세심하게 칠한 창문에서 응시하고 있다. 현재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통에 따르면, 이 남자는 비엔나 레오폴트슈타트 지역에 유대인들이 살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 랍비 토브 립만 헬러(1579–1654)이다. 후그스트라텐스가 비엔나에 머무는 동안 이 그림이 그려졌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화가인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인 <화가의 아틀리에>를 만났다. 작년에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그의 특별전을 보고 나서 더 관심을 가진 화가였다. 그의 최고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그가 죽은 후 아내 카테리나는 11명의 아이들과 궁핍했음에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는 이젤에 그려진 월계관(영예)에 색칠을 하고 있고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트럼펫을 든 채 책을 든 여인은 역사를 관장하는 신인 클리오다. 그녀의 뒤에 있는 지도는 세상과의 소통을 의미한단다. 화실의 커튼이 열려 있다는 것은 가려진 것을 열어 보여준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요소로 사명과 역할을 표현한 작품이다. 베르메르가 말하는 화가란 영예를 표현하는 사람으로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갖고 세상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예술을 사랑한 히틀러에게 약탈을 당했었다고 한다.

<성찬식, 폰 프루치트걸란덴 움게벤> 얀 다비드 드 헴. 1648년

드 헴의 정물화는 놀라운 사실주의와 풍부한 형태의 모습으로 특징지어진다. 성배와 숙주가 있는 틈새는 성찬례에 대한 언급으로 포도와 곡물 덩어리로 장식되어 있다.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에 대한 헌신적인 비문은 세레스와 박쿠스(빵과 와인)의 이러한 선물들을 남네덜란드 섭정의 중죄한 정부의 상징으로 격상시켰다.

 

<사과 깎는 여인>다. 제라르드 터 호흐. 1660년.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미세한 그림"의 특징적인 예다. 작은 소녀가 어머니가 사과 껍질을 벗기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가정적인 장면은 아마도 아이의 모든 소원을 성취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심지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경고하는 도덕성 경구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부모 돌봄은 17세기 네덜란드 그림과 문학에서 인기있는 주제였다.

<남자의 초상>과 <여자의 초상>이다. 크리스토프 암베르그. 1525년.

 

아래 그림은 피카소의 작품이다. 피카소, 고흐, 베르메르 등의 그림은 1점 씩 있었는데 과거에는 화려했지만 세계 1차대전으로 세력이 급약해진 오스트리아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역시 미술은 경제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