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미술관/비엔나 미술사박물관

2일 빈 미술사박물관 회화 위주

boriburuuu 2019. 8. 18. 21:32

<브뤼셀에 있는 그의 갤러리에 있는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 1651>이다.

레오폴드 빌헬름(1614~1662)의 큰 의의는 예술의 후원자로서의 역할보다는 스페인 네더 땅의 섭정으로서의 그의 정치 활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1400개가 넘는 그림으로 갤러리를 편집했으며, 대부분은 오늘날 이 미술관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테니어는 해밀턴 공작의 수집품에서 51개의 이탈리아 이안 작품을 볼 때 대공과 다른 궁정들과 함께 자신을 묘사한다. 레오폴드 빌헬름은 이 사진이 그려지기 직전에 그것들을 구입했었다.

터너의 작품이다.

<수산나와 두 명의 장로, 1555. 틴토레토>다.  수산나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정원에서 목욕을 하는데 하녀가 자리를 뜬 사이 음욕에 눈이 먼 두 장로가 다가와 벗은 몸을 본 것을 빌미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젊은 남자와 간통하는 것을 봤다고 거짓말을 하겠다고 협박한다. 당시 간통죄는 사형이었지만 수산나는 거절하고 고발당했지만 신께 기도를 하고 청년 다니엘이 그녀의 무죄를 밝혀주고 사악한 두 장로는 사형을 당한다는 성경의 일화를 그린 그림으로 순결의 덕은 결국 악을 물리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이 그림을 그린 틴토레토는 티치아노, 베로네세와 더불어 16세기 말 베네치아 화단의 중심이다. 

<초원의 마돈나, 1506. 라파엘로>다.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16세의 나이에 르네상스 3대 거장에 오른 라파엘로는 성모자를 많이 그렸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가서 교황청의 건축과 회화 등 미술 분야 총감독 책임을 맡고 일하던 중 37세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이 그림은 성모가 초원에서 노는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을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는 수난을 암시하는 가느다란 십자가를 들고 있고 곡선과 색을 이용해 부드럽게 표현했고 완벽한 삼각구도는 안정감이 있어 이러한 화법은 이후 인상파가 나타나기 전까지 교과서처럼 쓰였다고 한다.

<엠마오의 저녁식사>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젠 카라바조. 1621년.

부활 후 그리스도는 엠마우스로 가는 길에 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초상화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식사 때 빵을 깨뜨리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정체를 드러낸다. 이 그림은 1600년경부터 카라바조(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그림의 오마주다. 이 예술가는 아마도 제노안일 가능성이 있는 네덜란드의 카라바조(주로 헨드릭 테르브루겐)의 후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1605 카라바조>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으로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대표화가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카라바조는 이 주제로 여러번 그림을 그렸는데 교황에게 사면을 받기 위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다윗과 골리앗에서는 어린 다윗의 얼굴은 순진무구했던 어린 날의 자신의 얼굴을, 골리앗의 얼굴은 살인 죄를 짓고 사형을 언도 받아 몸을 피해 여기저기를 떠도는 현재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도에게 가시관을 씌움>이란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카라바조는 이 직품에서 예수와 세 군인의 모습만 그렸는데 빛은 벽을 타고 왼쪽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비춘다. 예수의 옷은 벗겨졌고 조롱하기 위해 진홍색 외투가 입혀진다. 머리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우고 두 갈대를 엇갈리게 하여 조이고 있다. 예수는 왕이 왕홀을 손에 들듯 주어진 갈대를 힘없이 오른손으로 들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고통과 조롱이다. 그러나 예수의 몸은 너무나 깨끗하게 빛나고 있다. 카라바조는 인물들을 역동적이면서 사실 그대로 묘사했다.

<돌아온 탕자. 구에르치노 (1619)>이다. 돼지치기의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 젊은이의 모습은 축복받은 사람들이 천국의 입구에서 천사들에 의해 옷이 입혀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아버지를 성부의 전통적인 모습과 동일시했던것 같다.

귀도 레니의 <그리스도의 세례>다. 1622년.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설교하고 세례를 받고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예수 자신이 옷을 들고 천사들과 함께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 강으로 들어서면 성령은 비둘기의 형태로 내려온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은 내가 매우 기뻐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현실주의와 이상화, 세속적이고 천상의 것들이 균형 잡힌 구성으로 이 엄숙한 장면에 서로를 스며들며 라파엘의 예술을 모델로 삼는다.

<에르제르조긴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루이스 엘리자베스 비게-레브룬. 1778년. 프랜시스 1세와 마리아 테레사의 막내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교한 스타일로 머리를 쌓아 올린 채 가운 à l'anglaise를 입고 있다. 1770년 결혼한 루이 16세의 흉상은 오른쪽 상단 구석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비엔나에 있는 젊은 여왕의 어머니에게 운명지어졌다. 그녀는 딸에게 "나는 당신의 큰 초상화에 기쁘다!"라는 말로 대답하고 호프부르크 궁전에 그림을 전시했다.

빈 미술사박물관에는 아주 특별한 방이 하나 있다. 바로 벨라스케스가 그린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 공주의 작품들만을 모아 놓은 방이다. 펠리페 4세와 인간적으로도 우정이 깊었던 벨라스케스에게 마르가리타 공주는 소중한 조카딸 같은 존재였다. 그의 화폭에 담긴 공주의 모습속에서 벨라스케스의 사랑이 느껴진다. 정혼자에게 공주의 성장 과정을 알리기 위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 공주가 성장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혈통을 지키려는 왕가의 근친혼은 그 자손들에게 유전적 폐해를 남겼는데 마르가리타 공주 역시 커가면서 얼굴이 길어지고 주걱턱이 심해져서 벨라스케스는 그런 특징이 나타나지 않게 잘 그려줬다고 한다. 비운의 왕녀 마르가리타는 삼촌과 결혼해 네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인판틴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다. 1654년.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필립 4세 결혼에서 태어난 첫 아이였다.  3살 때 공주를 보여준다.

<파란 드레스의 인판틴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다.  그의 죽음 1년 전, 벨라즈케스는 8살의 유아와 그녀의 남동생 필립 프로스퍼(Inv. No.,GG_319)는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그 이미지는 1666년 Infantin과 결혼한 Leopold I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화가의 개인적인 스타일은 여기서 절정에 달했다. 넓은 그림 표면에서 반짝이는 색 패치가 거의 인상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적절한 거리에서만 닫힌 가소성의 인상이 생겨난다.

<인판틴 마리아 테레사(1638-1683)>다. 마리아 테레사(1638~1683)는 필립 4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프랑스인의 딸이었다. 이 초상화는  그녀를 위해 고려되고 있던 1653년 비엔나, 파리 및 브뤼셀의 법원에 보내진 사진 중 하나다. 결국 1660년 그녀는 사촌인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도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의 임무의 일부였다.

 

15세기에 태어났지만 현대 작품이라고 해도 될만큼 파격적인 그림을 그렸던 주세페 아르킴볼로의 연작이다. 과일, 꽃, 동물 등 일상의 사물을 적절하게 배열해 인물의 표정과 형태를 표현한 초상화를 그려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오늘날 만화의 시초가 된 화가 중 하나다. 1562년 프라하의 막시밀리언 황제의 궁정에서 활동했고 루돌프 2세 때 전성기였다.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팜플렛에 자주 등장하는 <베르툰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돌프 2세>는 채소 ,과일, 곡식으로 뒤범벅이 된 기상천외한 초상화로 엽기적이다.

아래 그림은 빈 미술사박물관의 4원소를 표현한 연작 중 하나인 <물>이다. 물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물고기들을 등장시킨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물고기가 다 살아 움직일 듯하다.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려준다. 육식 동물인 상어는 입을 나타내는데 쓰였고 의복을 구성하는 많은 동물들은 순전히 장식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 화가의 기발한 발상을 뒷받침해주는 관찰력과 묘사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래 그림은 연작 중 <겨울>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로 머리카락을 표현하고 말라 비틀어진 나무줄기가 주름진 얼굴을 대신하고 있으며 노란 밀집은 몸통이 되어 차가운 몸을 그나마 덥혀 줄것 같다. 그의 4계절 연작은 루브르에서도 볼 수 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표현했는데 인간의 초년, 중년, 노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래 그림은 <여름>이다. 인간으로 치면 한창 왕성한 청년기로 각종 과일과 곡식 등 풍요로운 모습이다. 이 작품은 막스밀리안 2세를 위한 '사계절' 연작 중의 하나로 정물화중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꽃과 과일, 야채, 나무등을 그렸지만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 작품 속의 청년은 곡물 줄기와 옥수수 잎으로 된 옷을 입고 있고, 그의 얼굴은 과일과 야채로 되어 있는데, 코는 호박, 치아는 강낭콩, 붉은색 뺨은 복숭아로 묘사되어 있다. 매우 익살스러운 모습이네

아래 그림은 <불>이다. 머리카락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고 목은 촛불, 가슴은 대포와 총 등 불을 뿜어내는 무기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불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결합해 사람의 형상으로 완성했는데 무언가의 결실을 정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인물을 칭송하려는 화가의 의도가 담겨 있어서인지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이 그림들은 당시에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세례자 성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이다. 작품을 보면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가 그린 여성의 얼굴에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띠게 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화가들처럼 단순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모방하지 않았고, 롬바르디아의 자연주의를 지키면서 라파엘로풍의 우아함을 도입하면서 서정성이 넘치는 독자적 화풍을 확립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양식을 준다.

 

<제우스와 이오, 1532. 코레조>다. 16세기 초반의 혁신적인 화가 코레조는 전통을 깨는 빛과 그림자의 처리 솜씨로 예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그림은 '주피터의 사랑' 연작 중 일부로 제우스가 강의 신의 딸인 이오를 보고 반해 다가가려하자 수줍은 이오는 도망가려 했으나 제우스는 땅을 가로질러 어두운 안개를 퍼뜨리고 구름으로 변신해 님프인 이오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림을 의뢰한 곤차가 공작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가 만토바를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바쳤다고 하는데 실제 인물이 아닌 구름과 입을 맞추고 있는 이오의 표정이 압권이어서 초기 르네상스에서 가장 에로틱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알렉산드로 알로리의 <마리아 데 메디치>다. 1555년.  르네상스 초기부터 피렌체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와 워크샵은 메디치에서 일했다. 1570년 코시모 1세는 투스카니의 그랜드 듀크가 되어 이 전직 은행가 가문을 유럽의 가장 위대한 왕조로 격상시켰다. 이 초상화는 아마도 코시모의 딸 중 한 명을 묘사하고 있으며 메디치와 합스부르크 사이의 많은 결혼 중 하나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비엔나로 보내졌을지도 모른다. 

아래 그림은 원근법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바사이티의 작품인데 예수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나 제자로 거두는 일화를 그려내고 있다.

<summoning the Sons of Zebedee, 1515. 마르코 바사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