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미술관/크뢸러 뮐러 미술관(고흐의 숲)

크뢸러 뮐러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2

boriburuuu 2020. 11. 8. 14:35

다시 반 고흐의 <밀 낟가리가 있는 들판>이다. 1885년 7-8월.

반 고흐의 <프로방스 농가 근처의 건초더미>다. 1888년 6월 12일부터 13일까지. 

코렌벨드 1889년 6월 말부터 9월 . <수확하는 사람과 태양이 있는 밀밭>이다. 해도 노랗고 사람을 너무 쬐끄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온통 노란 붓질 붓질

고흐의 <잔디 깎는 사람>이다. 1885년 7월 8일.

 

<씨뿌리는 사람>이다. 이때 까지도 밀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습이다. 1888년 6월 17-28일.

고흐의 < 씨 뿌리는 사람>이다.  밀레의 작품을 따라 그렸다.  1890년.  그러나 특유의 푸른색이 등장했다.

1888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애인(밀리엣 중위의 초상화)>빈센트 반 고흐

폴-유젠 밀리엣은 프랑스군의 주아베 연대의 두 번째 중위다(이것은 달과 오른쪽 상단에 별이 표시되어 있다). 아를레스에서 그는 빈센트의 그림과 술의 동반자다. 그는 한동안 예술가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고 그림 여행에 동행했다. 여자들과의 접촉이 어색한 반 고흐는 그 중위가 호감 가는 도피행위를 한 것에 대해 감탄한다. “밀리엣은 운이 좋으니 원하는 알레시엔을 다 갖고 있지만, 거기 있으니 그림을 그릴 수 없고, 화가라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이 초상화에서 그는 그를 연인의 원형으로 묘사한다. 얼굴은 느슨하고 얇은 붓놀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배경에는 넓고 두꺼운 스트로크가 적용되 있다. 모자는 다시 얇고 고르게 칠해져 있다. 색깔도 대조적이다. 반 고흐는 밀리엣이 모델로 앉는 것을 잘하지 못하지만, '그 창백하고 무광택인 안색, 에메랄드빛 배경에 대항하는 붉은 케피'에 만족한다고 쓰고 있다. 

 

<마담 룰레인의 초상>이다. 1888년 12월~1월 1889년  아를레스에서 반 고흐는 우체국장 조셉 롤린과 그의 아내 아우구스티누스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그들과 그들의 세 자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라 베르세우스'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요람이나 자장가를 흔드는 그녀를 의미한다. 그녀는 손에 든 끈을 이용해 아기의 요람을 흔들었다. 반 고흐는 이 초상화에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롤린 부인의 닮은 점보다 그림의 분위기에 더 관심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성의 상징이다. 자장가의 음악 노트와 같은 제목과 색상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어두운 배경에는 달리아의 단순화된 묘사가 흩어져 있다. 반 고흐는 1889년 첫 달에 이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종종 꽃 모티브를 배경으로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더 이상 그의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편배달부 조셉 롤린의 초상>이다. 1889년 2-3월.  조셉 롤린은 아를레스 역에서 우체국장으로 일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동생 테오에게 그림을 보내기 위해 자주 그곳에 갔고 그들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를 ‘비통하지도, 우울하지도, 완벽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항상 완벽하게 정직하지도 않은 남자’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정말 좋은 친구, 정말 현명하고, 너무도 감정적이고, 충실한 친구.”라며. 1888년 8월부터 1889년 4월까지 그는 조셉의 6개의 연속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중 3개는 배경에 꽃이 있었다. 이 화려한 그림에서 그는 여름 꽃을 선택했다. 양귀비, 옥수수꽃, 데이지, 장미는 요셉의 얼굴과 양식화된 곱슬머리로 가득 찬 수염과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정확하게 칠해져 있다. 여기서 반 고흐는 빠르고 유창한 붓놀림으로 물감을 칠했다. 가난한 반 고흐는 항상 모델을 찾고 있었다. 조셉의 아내와 세 아이를 그릴 기회가 생겼을 때, 그는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는 롤린 가문의 초상화를 20여 점 이상 그렸다. 

1890년 5월 초, <착한 사마리아인(델라크루아 이후) >다.

고흐의 1883년 8월 초에 그린 <어부의 아내>다. 아래의 그림과 한 쌍이다.

반 고흐의 <해변의 어부>이다.  1883년 8월 초

고흐의 <밀집과  떠오르는 달이 있는 풍경>이다.   1889년 7월

반 고흐의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이다. 1890년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  반 고흐에게 사이프러스 나무는 프로방스의 궁극적인 상징이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어.”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해바라기 캔버스처럼 그들과 함께 뭔가를 하고 싶어. 내가 보는 것처럼 아직 아무도 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야. 이집트 오벨리스크처럼 선과 비율에 관해서는 아름답다. 그리고 녹색은 아주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 있다.'  반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망명지를 떠나기 직전 밤까지 프로방스의 시골길을 그린다. 이것은 기존의 풍경이 아니라, 아마도 생 레미의 마지막 기억으로 그리고 프로방스에 머무는 동안 그가 얻은 많은 인상들을 요약한 것으로, 그 대신 자신의 재량으로 구성되었다. 반 고흐는 생레미에서 색과 붓놀림을 사용하는 실험을 한다. 많은 작품들이 우아한 형태와 소용돌이치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짧고 리듬감 있는 물결 붓놀림은 그림의 역동성을 크게 해 준다. 

반 고흐의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이다. 남프랑스에 갔을 때 아를에서 여길 갔었는데.  1888년 9월 16일  반 고흐는 한동안 밤의 그림을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흑백과 회색의 그늘에서, 그러나 실제로는 풍부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파격적인 것은 그가 시투와 어둠 속에 있는 알레스의 카페의 가스등 테라스를 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깔은 밤과 낮에 다른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측면은 따뜻한 노란색, 녹색, 주황색의 색상과 배경의 집들의 짙은 파란색으로 강화된 별빛 하늘의 짙은 파란색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다. 반 고흐는 그 효과에 만족했다. “나는 가스등이 풍부하다고 믿는다. 가스등은 결국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파란색을 강화시킨다고 믿는다.” 그는 여동생 윌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밤에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가 예리하게 관찰한다는 사실은 후기 천문학 연구에 의해 밝혀진다. 그는 별자리가 1888년 9월 16일 또는 17일 밤에 나타 났을 때 정확하게 그렸다. 

반 고흐의 <분홍색 복숭아 나무>다. 1888년 3월 30일.  1888년 봄에 알레스의 과일 나무가 피었을 때, 반 고흐는 거의 매일 그것들을 그린다. 따라서 짧은 기간에 그는 14개의 그림과 꽃 피는 나무의 여러 그림과 스케치를 제작한다. 그는 핑크 복숭아 나무를 이 시리즈에서 가장 성공적인 나무 중 하나로 여긴다. 반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리는 날 저녁, 그는 안톤 마우브가 죽었다고 그에게 말하려는 여동생의 편지를 발견한다. 이 화가는 결혼으로 사촌뿐만 아니라 기름과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그에게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그 소식을 듣고 메우 충격적이었다고  편지를 쓴다. “그리고 나는 내 그림에 ‘마우브 빈센트 앤드 테오에게’라고 썼는데, 지금 상태로는 좋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마우브 부인에게 보내겠다. 마우브를 추모하기 위해 .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이다. 1888년 4월

<아를의 앙글루아 다리>이다. 1888년 3월 중순. 빈센트 반 고흐(1853년 - 1890년)  알레스에 도착한 직후 반 고흐는 4점의 그림, 2점의 그림, 수채화, 스케치 등 마을 바로 남쪽의 다른 버전의 도개교를 그린다. 이 그림은 역동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운하는 총 이미지를 전달하는 대각선을 형성한다. 이것은 다리를 바라보게하고 다리를 가로지르는  마차를 향하게 한다.

고흐의 <나막신이 있는 정물>이다. 1881년 11-12월

고흐의 <호박과 사과가 있는 정물>이다.